상단 후불탱화 법문 6편 십대제자중 지혜제일 사리불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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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1-09 11:39 조회14,3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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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 1, 10대 제자가 되기 위한 경쟁률
이 1,200명 중에서 뛰어난 아라한이 500명이었다고 하며 그 500명 안에서 으뜸이었던 10명의 제자를 10대제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된 제자 1,200명 중 뛰어난 500명에 들어가려면 약 2.4: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이다. 그 500명 중에서 10대 제자 안에 들려면 50: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즉, 처음 1,200명의 아라한 전체를 놓고 보자면 에서 으뜸가는 10명이라고 하면 120: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이다.
이 정도라면 지옥 같다거나 살인적이라고 불리는 입시나 취업 경쟁률을 너끈히 뛰어넘을 정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10대 제자라고 불리는 분들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쟁이 오직 실력으로 승부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대 제자의 출신을 살펴보면 인도 최고 계급인 바라문부터 최하위 천민 계급의 수다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출가자는 부처님께 귀의할 때 이미 세속의 계급이나 재산, 지위 등을 모두 버리고 오직 수행자로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세속의 습관이나 시선으로부터 단번에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0대 제자 중에 천민 계급 출신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반대로 부처님의 속가 신분은 제2계급에 속하는 찰제리였지만 10대 제자 중에는 속가에서 부처님보다 높은 신분인 바라문 출신도 많았다. 이 또한 타고난 계급이나 신분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교단 내에서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부처님께 귀의한 첫 번째 10대 제자, 사리불
아함경 여래의 제자품에서 부처님은 많은 비구들 앞에서 직접 자신의 제자들을 칭찬한다. 그때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런 칭찬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위대한 지혜를 가진 내 제자들 중에서 사리불이 으뜸이다.”
실로 사리불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열반할 때까지 교단의 중심적인 인물로써 활약할 뿐 아니라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대표적인 경전에 항상 언급되며 수많은 천신, 인간, 비구, 중생 등 각 대중들 사이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이끄는 독보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사리불은 과연 부처님에게 어떤 제자였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리불은 당시 중인도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 바라문 출신이다. 당시 마가다국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빔비사라왕과 부처님은 평생에 걸쳐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특히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출가하여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 이미 인연을 쌓았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승가가 생기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에서 부처님은 세 명의 중요한 제자를 얻는다. 그들이 바로 10대 제자 중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부처님의 뒤를 이었던 의발제자 마하가섭이다.
반야심경을 통해 익숙한 이름, 사리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로 시작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여느 경전들처럼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일방적인 말씀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총 270자로 구성된 짧고도 완전무결한 이 아름다운 경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이다.
사리불(舍利弗)은 산스크리트어 이름 샤리푸트라(Sariputra)를 음역한 것이다. 샤리푸트라(Sariputra)를 의역하면 ‘사리의 아들’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리불은‘사리자(舍利子)’로도 불린다. 부처님은 반야심경을 설하시며 사리자의 이름을 두 번 부른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다보면 저절로 익숙해지는 이름이 바로 사리불이다. 그렇다면 먼저 사리불에게 이름을 준 부모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촉망받는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사리와 티샤의 아들
‘사리’는 사리불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이름이다. 그녀는 ‘니타라’라는 뛰어난 브라만의 딸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특히 새처럼 푸르고 깊은 눈을 지녔다고 하여 ‘사리(Rupasari)’라고 불렸다. 사리가 한창 아름답게 성장했을 때 남인도 지방에서 젊은 ‘논사(論師)’로 이름난 바라문 출신의 ‘티샤’라는 청년이 ‘니타라’를 찾아왔다. 뛰어난 두 바라문은 각자의 지식과 철학을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고 마침내 티샤가 니타라를 이겼다. 이에 왕은 ‘니타라’가 다스리던 마을을 ‘티샤’에게 내렸다.
당시 학문이나 철학으로 왕에게 인정을 받은 바라문들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마을이나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런 경우 바라문의 이름을 그대로 마을의 이름이 되었고 니타라처럼 논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한 왕에게 받은 재산은 대대손손 세습되곤 했다. 그래서 바라문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매우 중요했고, 뛰어난 논사들은 매우 존경을 받았다. 젊은 논사 티샤는 마가다국에서 단번에 유명해졌다. 남인도에서 온 티샤는 니타라가 다스리던 마을을 받은 후 니타라의 아름다운 딸 사리와 결혼하여 마가다국에 정착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오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사리불이다.
사리가 첫 아이(사리불)를 임신했을 때, 남동생이자 역시 유명한 논사(論師)였던 구치라(사리불의 외삼촌)가 찾아왔다. 그는 사리에게 ‘누님의 아이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르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구치라는 훗날 사리불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완전무결한 엄마 친구 아들
아름다운 사리와 총명한 티샤의 여덟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리불의 어린 시절 이름은 ‘우파티샤’였다. 장남이 가문의 재산과 지위, 명예를 세습하는 바라문의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이름이자 그의 가족이 다스리는 마을의 이름‘티샤’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태어난 우파티샤는 성장하면서 타고난 높은 신분에 어울리는 탁월한 지혜를 빛내며 가족과 마을 전체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는 일찌감치 인도의 고대 성전인 네 가지 베다를 가뿐하게 통달하였고 학문과 지성이 풍부하여 이미 10살 무렵에는 소년학자라는 찬사를 들었다. 또한 16세 때는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미 거침없는 논리와 언변으로 부친의 제자들을 비롯한 논사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젊은 시절, 외할아버지‘니타라’를 이길 정도로 뛰어난 논사였던 아버지 티샤 역시 아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리불은 종교를 관장하고 신과 소통하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역할이 요구되는 바라문 계급의 엘리트 코스를 위풍당당하게 걸어간 모범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사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고 사리불 역시 완벽한 아들답게 효심이 깊었다. 이 모자(母子)의 관계는 평생 매우 각별하여 훗날 사리불은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 열반을 맞이하게 된다. 사리불이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제도한 사람 역시 그의 어머니였다.
진리의 길을 찾기 위한 갈등과 출가
촉망받는 신동 사리불은 어느 날 바라문교에서 집전하는 커다란 제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매년 영축산(靈竺山)에서 진행되는 이 제사는 당시 바라문교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축제였다. 따라서 아직 젊은 청년에 불과한 사리불이 이 제사에 참가하는 것은 바라문으로써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부푼 마음으로 친구 목건련과 함께 참석한 사리불은 막상 요란스럽고 번잡할 뿐 아니라 괴기스럽기까지 한 제사를 경험하면서 깊은 환멸과 허무함을 느꼈다. 목건련의 생각도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 사리불은 곧바로 진실을 깨달음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다.
출세와 명예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고생을 자처하며 수행자가 되겠다는 사리불의 말에 부모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사리불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결국 사리불은 7일간의 단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얻은 후, 목건련과 함께 출가하였다. 출가 후 그가 찾아간 스승은 당시 유명한 논사(論師)라고 일컬어지는 6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 벨라티 푸트라(Sanjaya belrati putra)였다.
첫 번째 스승 산자야와의 만남
산자야는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에서‘회의론자’로 높은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 진리란 어떻게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였던 그는 결코 어떤 ‘입장’에 서지 않는 판단 중지의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리불은 산자야의 가르침이 자신이 찾던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리하여 산자야의 문하에 들어간 지 7일 만에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깨우쳤다. 이에 산자야는 기뻐하며 사리불을 200명이 넘는 자신의 제자들 중 으뜸인 상수제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교단을 맡겼다.
처음 사리불이 출가를 결심했을 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들도 그가 단시간에 명망 높은 산자야의 가르침을 모두 깨우치고 그의 상수제자이자 스승을 대신하여 교단을 이끄는 위치에 서자 선망의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사리불은 여기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스승 산자야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지만 진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리불은 스스로 깨달음을 구해보기로 결심하고 산자야의 허락을 얻어 따로 수도장을 마련했다.
앗사지 비구와의 인연
잠시 스승의 곁을 떠나 홀로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사리불은 길에서 걸식을 하는 비구를 보게 되었다. 겉모습은 소박하여 특별히 눈길을 끄는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그를 둘러싼 어떤 것으로부터도 평온해 보이는 비구의 얼굴에서 사리불은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홀린 것처럼 눈으로 비구를 쫓던 사리불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마 이 세상에 참다운 성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그런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이 사람에게 그 스승이 누구이며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리라.’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리고 멀리서 비구를 따르던 사리불은 그가 공양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는 사문이신가요?"
“예, 저는 고타마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하고 있는 앗사지라고 합니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사리불의 열정이 드디어 인연을 만난 것이다.
부처님과 앗사지 비구 그리고 사리불
부처님과 앗사지 비구의 인연은 특별했다. 출가 후 누구보다 6년 동안 누구보다 혹독하게 고행을 하며 깨달음을 구했다. 지독한 고행 끝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을 때 부처님은 문득 고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 세상을 떠날 것을 염려한 제석천왕(천신)이 관여했다고도 한다. 미련 없이 고행을 버린 부처님은 목욕을 하고 수자타로부터 우유죽 한 그릇을 공양 받아 심신을 회복한다.
한편 부처님과 함께 고행을 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배척하였다. 혼자가 된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 후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명의 출가 수행자들이 있는 녹야원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최초의 설법을 한다. 이 법문을 들은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제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초전법륜이다. 그리고 다시 인연의 흐름이 이어져 앗사지 비구와 부처님의 양쪽 날개와도 같았던 사리불의 만남이 막 이루어진 것이다.
마하살타 왕자와 일곱 마리 새끼 호랑이
부처가 되기까지 거쳐 온 그 많은 생 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마하살타 왕자로 태어났을 때의 일이다. 세 형제 중 막내였던 마하살타 왕자는 자비심이 많고 보시하길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왕자는 형들과 함께 가까운 산으로 소풍을 갔다. 한참을 그곳에서 즐겁게 지내다가 왕궁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왕자는 굶주린 어미 호랑이를 보게 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굶었는지 어미 호랑이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일곱 마리 새끼가 어미의 빈 젖을 물고 간신히 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하살타 왕자는 즉시 어미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할 것을 결심한다. 자신의 생명을 보시하여 다른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왕자의 자비로운 마음에 하늘도 감동하였지만 당장 형과 부모님에게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왕자는 결국 자신은 잠시 후에 돌아가겠다고 거짓말을 한 뒤 형들이 사라지자 곧 호랑이 앞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려온 어미 호랑이는 왕자에게 다가갈 힘조차 없었다. 이에 왕자는 스스로 몸을 베어 피를 낸 후 어미 호랑이의 입 속에 더운 피를 흘려 넣어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자 호랑이는 차츰 기운을 차렸고 신선한 피 냄새를 맡자 왕자를 공격했다. 왕자는 어미 호랑이가 기운을 차리자 기뻐하며 기꺼이 자신의 몸을 보시했다. 왕자의 신선한 피와 살을 먹고 기운을 회복한 어미 호랑이는 곧 새끼들에게 젖을 물렸고, 굶어 죽기 직전의 새끼들은 어미의 젖을 먹고 위험에서 벗어났다.
한편 잠시 낮잠을 자던 왕은 불길한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때 마침 왕자들이 왕궁에 돌아왔다. 왕은 황급히 마하살타 왕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자들은 그가 산에 남았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신하들에게 서둘러 산에 가볼 것을 명령했다. 왕의 명을 받아 산에 간 신하들은 그곳에서 호랑이의 밥이 되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마하살타 왕자를 발견하였다. 간신히 시신을 수습하여 왕궁으로 돌아온 신하들은 왕에게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왕은 크게 탄식하며 왕자의 명복을 빌며 그의 자비로운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때 굶주린 어미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한 마하살타 왕자가 바로 부처님의 전생이며 굶주린 일곱 마리의 새끼 호랑이 중 첫째가 사리불이요, 둘째가 목건련 나머지 다섯 마리가 녹야원의 다섯 비구의 전생이었다. 마하살타 왕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새끼 호랑이들이 훗날 부처님과 제자로 다시 만난 것이다. 앗사지 비구를 비롯한 녹야원의 다섯 비구는 최초의 제자였으며 사리불과 목건련은 상수제자였으니 이들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는 사리불이라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십니까?
한편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앗사지 비구를 만난 사리불은 앗사지 비구의 스승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고 기뻤다. 스스로 깨달음을 이룬 고타마 족의 젊은 성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며 물었다.
“저는 사리불이라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십니까?”
그러자 앗사지 비구가 걸림 없이 대답하였다.
“예, 저희 스승께서는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났다가 인연을 따라 멸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 모든 것은 덧없어서 나면 멸하는 법이며, 났다가 멸하는 일이 끝나면 고요한 경지를 낙으로 삼는다(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고 가르치십니다.”
빼어난 총명함으로 진리를 알고자 정진해온 사리불은 이 한 마디를 듣고 귀가 번쩍했다. 그리고 곧바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 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달고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아직 부처님을 만나기도 전이었으니 참으로 깊은 선근이었다. 환희에 넘친 사리불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인연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앗사지 비구가 다시 대답하였다.
“저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더 깊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의 스승께서 가르치신 대로 외우고 있을 뿐입니다. 더욱 자세한 가르침을 원하신다면 저희 스승께 여쭈어보십시오.”
사리불은 앗사지 비구를 따로 곧장 부처님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 순간 자신과 함께 출가한 목건련이 떠올랐다. 그는 앗사지 비구에게 그의 스승이 누구이며 부처님이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자세히 묻고는 즉시 목건련을 찾아갔다. 그리고 목건련에게 앗사지 비구에게 들은 인연법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사리불의 말을 들은 목건련도 이내 수다원과를 증득하였다. 아직 부처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진리의 길에 접어들은 것이다.
길을 열어라. 저기 내 훌륭한 상수제자가 오는구나
부처님께 귀의할 것을 결심한 사리불과 목건련은 스승 산자야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자신의 명성을 한껏 높여주었던 출중한 두 제자가 자신을 떠나겠다는 말에 산자야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척, 진리를 찾으려다 실패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하며 교단을 함께 이끌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진리를 깨닫는 길에 들어선 두 사람의 의지를 돌릴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 다른 제자들까지 사리불과 목건련의 뒤를 따랐다. 산자야의 제자들은 사리불과 목건련이 이미 스승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라자가하(왕사성)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논사(論師)이자 뛰어난 제자까지 두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산자야는 이렇게 순식간에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200 여명의 제자를 잃었다.
같은 시간, 빔비사라왕이 기증한 베르바나(죽림정사)에 머물고 계신 부처님은 천안으로 사리불과 목건련,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계셨다. 천여 명의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시던 부처님은 사리불과 목건련이 200여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죽림정사의 입구에 도착하자 빙그레 웃고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열어라. 저기 내 훌륭한 상수(上首)제자가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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