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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화살 맞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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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oBama 작성일13-12-05 20:41 조회28,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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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2013년 12월4일 달라스 보현사에서 있었던 수요참선 시간에 지암 선원장 스님께서 말씀 해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 입니다. 제가 옮기는 과정중에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과 본의 아니게 다르게 옮겨 졌을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혹시 내용을 읽어 보시고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암 선원장 스님께 질의를 하셔서 잘못된 점은 정정받으시길 바랍니다.


현실에 내가 염려하고 혹은 희노애락 하는 마음에 우리의 공부가 실제로 작용을 해야 합니다.  가족 단위로 걱정이 많죠? 아내는 남편을 걱정하고, 남편은 아내를 걱정하고, 또 아이들을 걱정을 짊어지고 살죠, 그렇죠?  날씨가 안 좋을때 운전하러 나가면 또 걱정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장사가 안되도 걱정이고, 아내 기분이 나쁜것만 봐도 하루종일 우울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누적된 감정들이 엉뚱한 곳에서 펑하고 터지죠.  그것을 부처님께선 2차 화살을 맞는거라 비유 하셨습니다.  그럼 경(經)에서 말하는 화살은 무엇을 말할까요?  화살이라는 것은 어록이나 조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인데 이는 곧 ‘번뇌’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화두(話頭) 챙기는 것도 망상이 아니냐고 물어보면, 이건 맞는 얘기입니다.  화두 챙기는 것도 망상입니다. 깨닫기 전에 어떤 도구를 사용하던 모든게 망상입니다.  위파사나도 사실은 망상입니다.  그런데, 그 망상하고 우리가 평소에 감정 일으키는데로 쓰는 망상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망상이라는 뜻에는 같아요.  그것도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어떤 대치법을 사용하느냐 하면.. ‘이열치열’ 이나 ‘땅에 엎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 라는 표현과 통하는 겁니다. 번뇌를 없앨려고 하면 번뇌가 있는데 없애야 한다는 생각까지 첨부가 되는 격입니다. 그래서, 그걸 없애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냥 관찰하고 알아채는 것입니다.  간화선에서는 화두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겁니다.  어떤 번뇌 앞에도 화두를 갖다 붙여서 그 번뇌가 새끼를 치고, 팔만사천가지의 작용을 다시 못하게, 2차 화살을맞지 않게 해주는게 알아채기와 화두 챙김입니다. 

감정이 나고 생각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번뇌입니다.  기분이 나쁘던 좋던간에 우리는 계속 끄달려 가게 되죠.  아내가 기분 나쁜것을 보는 순간 내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분 나쁜 마음이 일으키는 것이 번뇌이자, 1차 화살을 맞은겁니다.  무엇을 보고 번뇌를 일으키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부처님과 조사들은 화살을 맞았다고 비유합니다.  화살을 맞으면 상처가 납니다.  심하면 죽기도 합니다.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화살을 맞았으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치료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자비 명상으로도 할 수 있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어떤 수행법으로도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마음 치유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뿌리까지 해결을 하면 좋을련만, 마음 치유는 생채기에 연고를 발라주는 방법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곪게 하는 것보다는 연고라도 발라서 치료를 하는 게 좋긴 한데..  더 지혜로운 방법은 뿌리를 해결하는 것으로, 2차 3차 발병을 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왕 수행을 하는것 최대의 효과가 나오는 수행법을 하면 좋지 않을까 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근본망상까지 해결하지 않고, 사는데 있어서 마음이 평화롭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하면 굳이 자성(自性)을 깨달을려고 애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유(有)의 세계에서 몸받고 좋게 윤회하며 살면서 복력을 누리고 살고 싶다면, 굳이 자성을 깨달아서 내 근본을 해결해 없애겠다 안하셔도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신 중도(中道)법은 해탈법(解脫法) 입니다.  모든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같혀 있는 어떤 관념, 그게 유(有)던 무(無)던 벗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벗어나고 해결할려면 중도(中道)를 알아야 합니다.  유(有)도 무(無)도 아닌 중도를 알아야 합니다.  중도 깨닫는 방법이 시대마다, 각 나라로 건너가서 응용되어진 방법이 많습니다.  제가 체험하고 들고 온 방법이 간화선(看話禪)인 겁니다.  화두를 든다는건 2차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한 도구 입니다.  망념이 일어났을 때 ‘이뭣고’ 하고 알아채리는 순간 더 번지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걸 알아채리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또 번지잖아요.  그걸 2차 화살을 맞는다고 합니다.  1차 화살을 맞는것도 어리석지만, 2차 3차 계속 화살을 맞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중생인겁니다.  화살은 위험합니다.  번뇌는 위험합니다.  우리의 생사, 우비고뇌의 파도를 끊임없이 퍼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화살을 너무 맞다보면 화살을 맞은건지조차도 모를수가 있습니다.  그건 깨어있기가 안되어 있을때 그렇단 말입니다. 

공부의 가장 기본은 깨어있기 입니다.  내가 자비로와 진다는 설정을 했다하면 이는 보살도(菩薩道)를 행하는 겁니다.  순서대로 육바라밀을 닦아서 베풀고 베풀어서 나중에 나까지도 베풀수 있을때가 보살도의 극치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십지 보살의 단계까지 올라갑니다.  조사선(祖師禪)의 목적은 보살도하고는 다릅니다.  조사선 목적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간화선은 우리의 근본 자성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간화선은 우리들의 본래 부처 성품 자리를 바로 내 눈으로 보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뭔지를 해결해서 금생의 모든 생사를 해결하자는 겁니다.  내가 몸을 받고 싶으면 받고, 안받고 싶으면 금생에 다시 몸을 안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일초직입여래지 (一超直入如來地), 즉 한번 뛰어넘어서 바로 부처 지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과 자성을 깨닫기 위해서 화두법을 하는 것은 법리(法理)적으로 다릅니다.  간화선을 한 조사들을 보면 성정(性情)이 우리가 보살님들을 보듯이 곱고 다정하고 따듯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아주 따듯한 분도 계시지만, 때로는 달마나 임제처럼 번개 천둥처럼 우리들의 번뇌를 박살을 내기도 합니다.  그 분들의 화를 들으면 골이 쪼개진다고 합니다.  진짜로 골이 쪼개진다는 게 아니고 우리들의 생각 덩어리가 박살이 난다는 말입니다.  그 방법은 부드럽고 고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방법 역시 근기가 낮은 사람한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주 ‘내 문제를 꼭 해결하고 말리라’ 하면서 계속 화살을 맞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 화살 맞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때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신다 말입니다.  때로는 주장자로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때리기도 합니다.  그때 육신을 공격 받았지만, 그 제자는 생각 덩어리, 관념 덩어리가 깨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비와 은총을 입은 겁니다.  간화선이나 조사선에선 일반화 된 일이다 보니 스승한테 한 방망이 맞는게 은혜인 줄 아는데, 이게 세간적으로 오해 수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구지(俱?) 스님 얘기 아시죠?  어떤게 변치 않는 도(道)입니까 하고 물으면 구지 스님은 항상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시자가 그걸 계속 보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날 스승이 출타를 하고 재가자들이 와서 그 시자에게 뭍습니다.  구지스님이 안 계시지만, 구지스님께선 도를 물으면 뭐라 답해주시는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그 시자스님이 구지스님처럼 손가락 하나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무루 익은 수자들이 깨닫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무슨 도력이 있는 줄 알고, 계속 손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스승한테 그 얘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지 스님은 그 시자를 불러다가 무엇이 제1 의제인가 하고 묻자, 그 시자가 스승 앞에서 손가락을 치켜 보였습니다.  구지스님은 뒤에 단도를 쥐고 있다가 제자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는 순간 잡아채서 손가락을 잘라 버렸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그걸 어떻게 보겠습니까?  감옥에 갈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스승을 그렇게 보지는 않잖습니까?  분명히 거기에 무슨 뜻이 있으리라 그러겠죠?  그런데 아니다 다를까, 손가락이 잘린 시자가 “무엇이 제1의 의제냐?”하며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잘린 손가락을 들어올리려다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게 무루 익은 근기들이 하는 겁니다.  우리 세간(世間)의 애정(愛情)으로 보면 그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렇지만, 화두 공부를 하는 여러분은 뭔가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 스승이 폭력을 행사한건가요?  아니죠.  대자비를 베푼거죠.  스승은 그만한 도력이 있고 안목이 있어서 그럴만한 제자한테 하는 겁니다. 

2차 번뇌 화살 맞는것을 여러분이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속고 있습니다.  남편이 먼 길을 떠났어요.  몇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조바심이 납니다.  혹은 아내가 소식이 없어서 조바심이 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망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게 2차 화살을 맞는 겁니다. 이미 걱정거리 하나 있는데 거기다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보면 무슨일이 생기면 일단은 자기 가족한테 먼저 연락이 오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내와 남편을 염려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아내와 남편이 어떤일을 당했을 때 해결이 되겠습니까?  안되죠.  그러면, 간화선을 떠나서 마음 공부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자비 기도를 해주면 되는 겁니다.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조바심을 일으키는 게 2차 3차 화살을 맞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면서, 한시간 두시간 하루 이틀을 보내게 됩니다.  그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깨어있기 공부를 하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다면 제발 겸손하게 처음부터 다시 하세요.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그런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면서 지내고 있습니까? 

2차 화살을 맞지 맙시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번뇌’를 화살로 비유했습니다.  내가 화살을 계속 맞아서 우리들의 부처 목숨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아채기 잘 하시 길 바랍니다.  그래서, 2차 화살을 맞지 않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이를 일상생활에 적용을 잘 하시길 바랍니다.  일상생활의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 거기에 속지 말고 계속 깨어있기를 해서 ‘이뭣고’를 하던지 ‘오 하나라. 하나가 어디로 돌아갈까?’ 하던지, 혹 호흡을 하시는 분들은 호흡삼매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호흡삼매로도 우리의 번뇌가 정리되고 끊어지기도 합니다.  깨달음하고는 거리는 좀 있습니다만… 깨달음, 즉 간화선은 분명 의정(疑情)이 생기는 것은 깨달아집니다. 

부처님도 엄밀하게 말하면 ‘이뭣고’ 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가 뭔가 찾으셨잖아요.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찾아 출가 하셨잖아요.  내 몸뚱이 생각작용에서 끊임없이 생로병사 없는 도리를 찾아 해매지 않으셨겠어요?  그런데 비상비비상처정 (非想非非想處定), 완전히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에 가봐도 생사가 끊어진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 스스로가 검증해 내셨잖아요.  그래서, 비상비비상처정 그 대단한 경지도 아니라 하시고 깨닫고 나서 중도(中道)를 설파 하신겁니다. 

“없는것에 가서 처박힌들 그 역시 반쪽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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