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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본 수자상(壽者相)과 항상 깨어있어 자성(自性)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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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oBama 작성일14-01-25 21:25 조회18,3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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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2014년 1월22일 달라스 보현사에서 있었던 수요참선 시간에 지암 선원장 스님께서 말씀 해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 입니다. 제가 옮기는 과정중에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과 본의 아니게 다르게 옮겨 졌을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혹시 내용을 읽어 보시고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암 선원장 스님께 질의를 하셔서 잘못된 점은 정정받으시길 바랍니다.


금강경(金鋼經)에 나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은 우리네 인생(人生)의 다른 표현입니다.  여러분 수자상(壽者相)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보통 번역은 ‘오래산다는 생각’ 이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확한 번역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참선자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거나 우리가 목숨이 있다고 하는것’, ‘나는 살아있고 저것은 죽어있다는 것처럼 나는 목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  쉽게 대답해 보세요.  우리는 분명히 살아 있죠?  그게 바로 수자상(壽者相)인겁니다.  그런데, 자성(自性)의 자리에서 볼 때, 다시 말해서 도인(道人)이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있는거라 해도, 혹은 죽은것이라 해도 다 맞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범부(凡夫)인 우리가 살았다거나 죽었다 하면 그것은 틀린겁니다.  그 참 묘(妙)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는 그 상(相)안에서 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자재 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나 형제,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현실에 닥쳤을때 다들 아찔 하잖습니까?  부처님께서 무엇을 깨달아서 자유로와 지셨나요?  생사(生死)없는 도리를 깨달으셨잖아요.  부처님이 깨달으셔서 영생(永生)을 하신다고 하신게 무언가 하면, 삶이다 죽음이다 하는게 다 환(幻)인데,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시는 공부를 하셔서 해탈을 하신겁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육신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께선 분명히 생사없는 도리를 깨우쳐서 우리에게 그 법을 일러 주신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무슨 착각에 쌓여서 이런 중생짓을 계속 하고 있냐하면, 부처님께선 우리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갖혀 있는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범부(凡夫)가 곧 중생(衆生)입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건강 상태가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때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고뇌스러워 진다면,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이긴 하지만 이렇게 투자해오고 있고, 또 각자 집에서 나름대로 선정(禪定)을 익히는 그 시간들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좋을때는 누구던지 행복하고 좋으니, 우리가 하는 참선 공부는 좋을 때 써먹기 위한것은 아닙니다.  물론, 진짜 고수(高手)라면 좋을 때 역시 안 속는 공부를 하죠.  거기에 속아서 휘말려 들어가지 않는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다보니 고해(苦海)라 끊임없이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 겪고 있는 우환만 해결하면 걱정이 없을것 같지만, 그 우환에서 빠져 나왔다 싶으면, 자식이나 친척, 친구 등 나와 걸려있는 이로 인해서 새로운 우환을 접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고해(苦海)인 겁니다. 

다른 사람의 병고(病苦)는 우리한테는 법문(法文) 입니다.  특히 젊은 도반들은 잘 새겨 들어보세요.  연세가 드셔서 그렇다는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 끊임 착각하고 사는 연속입니다.  끊임없이 착각하고 오해하는 큰 가닥 중 하나는, 우리가 고뇌하고 불편해하는 그 정체가 그게 아닌겁니다.  우리는 제법 똑똑하게 지각하는 것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바보처럼 착각하고 오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잘났다고 오만 설정을 또 덧붙히고 합니다.  성인(聖人)들이 수도없이 말을 해 오건만, 우리가 아는 이론이 머릿속에 적게 들어서 이 상(相)이 안 내려지는게 아닙니다.  아는게 적어서 상(相)이 안 내려지는게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정확하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런겁니다.  왜 그럴까요?  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그대로 들여다 보고, 그 욕망의 뿌리를 보면 우리의 자성(自性)을 보는겁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욕망은 욕망대로 딸려 가버리고, 또 형이상학적인건 또 다로 분리를 하다보니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포인트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보고 있고, 듣고 있고, 오며가며 다 아는 ‘이것’ 다 알잖아요?  아픈지 다 압니다.  우리가 어딘가 아플때, 일념으로만 된다면은 아픈게 무언가를 보는것도 상관은 없지만, 더 정확한거는 아픈것은 아픈것이고그 아픔을 확연히 지각하고 있는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보도록 하는겁니다.  그 포커스가 바로 ‘이뭣고’ 입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실제로 아픈게 아픈게 아닌겁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 뿐인겁니다.  그 작용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작용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게 바로 우리의 세간사(世間事)입니다.  그 세간에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우비고뇌(憂悲苦惱), 생로병사(生老病死), 그리고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가치있는거라 생각하며 각각에 맞는 처방을 하곤 합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이래이래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겁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거나 아내가 내 자존심을 긁을때 화가 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화를 일으키고 있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본질을 해결해 버리면 남편이 아무리 바람을 피워도 내가 화가 날 일이 아닙니다.  실제 내 자성(自性)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근데 끊임없이 착각을 하니깐, 가지와 잎(枝葉)에서만 계속 시비(是非)를 하는 겁니다.  역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상(相) 바가지일 뿐입니다. 

가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면 얼마간은 들여다 볼려고 애를 써서 정신이 차려지지만, 그러한 자세가 삼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곳에서 성을 내곤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건 우리가 부지런하게 끊임없이 체크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금방 지치고 피로해서 딴짓하는데 놀아나게 된겁니다.  ‘이렇고 있구나’ 알아차리게 되면 그렇게까지 빠지지 않을텐데 자꾸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기초가 아주 탄탄해 질 때까지는 도반들이 모여서 법문을 듣고 탁마(琢磨)를 하는 이 시간을 정말 허투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 얘기를 들을때는 맞다고 여기지만 금새 다른 바쁜일, 또 가지와 잎에 팔려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상실감, 내 교만이 다치는 내 자존심이 다치는 어떤 일이 탁 발생을 하면 그만 거품이 다 일어나게 됩니다.  거품이 있어나 잠겨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게 됩니다.  공부를 해도 소용있네 없네 하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절에 다녀도 소용있네 없네 그럽니다. 

우리 도반들은 세간사에서 설정한 기쁜 일이 발생 하고, 또한 우환이 발생해도 그런 현상에 속지 말고 그 근원, 뿌리.  기쁨이나 우환에 아무런 상관 받지 않는 우리들의 청정무구한 자성을 바로 들어가야지 그런 현상에 속지 않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오늘 혹은 내일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미 많은 병고를 치른 분들도 있을텐데, 몸뚱이라는 건 도대체 뭡니까?  그 몽뚱아리를 부처님처럼 분석을 잘 해놓으신 분도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또 꼬라박아서 금새 몸뚱이에 집착하고 있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다시 정신을 제대로 차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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