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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자로서 참선공부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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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oBama 작성일14-02-21 11:59 조회18,3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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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2014년 2월19일 달라스 보현사에서 있었던 수요참선 시간에 지암 선원장 스님께서 말씀 해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 입니다. 제가 옮기는 과정중에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과 본의 아니게 다르게 옮겨 졌을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혹시 내용을 읽어 보시고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암 선원장 스님께 질의를 하셔서 잘못된 점은 정정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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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용맹심이어야 이 공부를 해낼수 있냐 하면?  재가자들이 마지막 발심(發心)하면 스님들보다 훨씬 큰 도를 깨칩니다.  더 살아있는 도를 깨쳐서 응용도 자유자재로 하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승의 공부를 하는게 아니라 대승의 도를 깨칠려고 공부하는 분들이잖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 자세를 면면히 들여다보면, 여러분들은 아직 소승적입니다.  어떻게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내게 이롭고 내가 사랑하는 아이, 남편, 가족에게 이로울 수 있고, 좀 더 크게는 내게 인연되는 모든 존재에게 어떻게하면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마음을 낸 사람들은 소소한 일에 속지 말아야 될 뿐만이나라 크게는 부모 형제 내 몸뚱이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면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느냐?  관심사가 일순위로 이 공부에 있다면 아플때도 공부를 합니다.  아프다는게 그저 작용일 뿐이고, 내가 아프다 하고 괴로워 할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점검을 하게 되는겁니다.  그렇다는 건 이미 아시고 계시는 분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2차 화살을 맞지 말라는 하는 말하고 다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데 우리는 계속 2차 화살을 맞고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속아서 무엇도 안할려고 핑계를 대고, 마음이 조금만 편치 않으면 그 헛깨비에 놀아나서 또 안할려고 합니다.  그렇게해선 우리가 어느 세월에 이 법을 만나서 맛을 보겠습니까? 

오늘 외국인 친구와 상담을 가졌었습니다.  서양인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지식적으로 접근하는 역사 사고때문에, 서양인들에게 공부를 시켜보면 굉장히 빨리 분별분석을 끝내가지고 옵니다.  그건 우리들보다 확실히 뛰어납니다.  그런데, 그게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흡족히 여겨서 될 일도 아닐 뿐더러, 본인 스스로도 분별분석 해서 가지고 온 것에 대해 흡족해 하지도 않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분석만 해서는 대책이 없는 겁니다.  분석을 못하게 하는 여러 절차중에서 내가 보기에는 우리 화두(가 최선인 듯 합니다).  분석이 될 때 화두를 한번 들어봐요, 그게 알겠는가?  오죽하면 모기가 철로된 소에 피를 뽑아 먹는 도리라는 비유를 했겠습니까?  도대체 알음앓이로는 뚫고 들어갈 데가 없는 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아주 따지기를 좋아하는 맹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차를 따르는 스승에 묻습니다.  “새소리를 비롯해서 모든 소리는 부처의 음성이고, 모든 형상은 부처의 모습이라 하니, 차를 따르는 소리도 부처의 소리입니까?”  그러자, 스승께서 주장자를 가지고 그 제자의 머리를 내리 치셨습니다.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자, 다시금 묻습니다.  “화장실에서 대, 소변을 볼 때 나오는 소리도 부처님의 소리입니까?” 그러자, 다시금 스승께서 주장자를 가지고 제자의 머리를 내리 치셨습니다.  제자가 다시금 묻습니다.  “모든 드러나 있는 형상은 다 부처님의 모습이라 하니, 지옥에 있는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모습도 부처님의 모습입니까?”  이렇듯 어떻게 알음앓이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조차도 영혼이 있는가에 대한, 신의 존재에 대한, 이 세상이 영원한거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그에 대해서, 부처님도 밝힐수 없는 부분이라 말씀을 안 하셨다 하기도 하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해준다 한들 우리들의 해탈과 무관하기 때문이었기에 그렇다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후자가 조금은 더 세련된 대답이기는 해도 그 역시 반쪽짜리 답변입니다.  부처님은 왜 대답을 안 하셨을까요?  어리석은 질문이라 대답을 안 하셨을까요?  하지만,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어리석은 질문들에는 다 대답을 해 주셨잖아요.  부처님께선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건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답을 하는 순간 병통이 팔만사천가지로 벌어질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하다 해도, 영원치 않다 해도, 신이 있다 해도, 신이 없다 해도, 영혼이 있다 해도, 영원이 없다 해도.. 그건 어느쪽으로 대답을 해줘도,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라고 대답을 해줘도 병통이 팔만사천가지로 벌어질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애정어린 방법으로, 너희들이 스스로 봐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없는건지 있는건지, 없는것도 아니고 있는것도 아닌지, 너희 스스로 봐라 하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스스로 보는 작업만 남은 겁니다. 자꾸 미뤄서는 기약이 없습니다. 놀더라도 아프더라도 해도 사랑을 한다해도 언제나 우리의 관심사를 그것을 제1순위로 끌어 올리려고 애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다보면 저절로 발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발심이 일어나면 그때는 그냥 하게 됩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무상하다 어쩌다 하면 늦어지게 됩니다.  애 안쓰는 사람은 발심도 그만큼 늦어집니다. 

일언지하 확철대오 (一言之下廓徹大悟) 한다고, 법문(法文)만 가지고 하는 공부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부방법은 너무 위험하고 병통(病痛)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잘못 받아들이면 병통이 많을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교만을 내려놓고 나의 알음앓이를 최대한으로 비워서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 들일때 병이 치료되기 시작하는 것이지, 내가 어떤 가르침이던지 분석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교만만 치성해지지 절대로 바탕을 볼 기약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지키고 정진하라면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가르치셨습니다.  깨달음의 분상에서 보면 그게 왜 진리고 궁극이겠습니까?  그냥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처방해주신 약이자 방편인겁니다.  우리 처지가 그 방편을 무시할 수 있는 근기며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방편을 무시해도 될만큼 걸림이 없거나 탕탕무애(蕩蕩無碍 )하게 마음을 일으키고 허공처럼 바람처럼 마음을 작용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탐욕에 속고 애욕에 속습니다.  그러니 그 약방문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은 교만이 치성한 시대인지라..  법문만 가지고 공부하는 문맥 사람들은 그런 약방문을 무시합니다.  ‘이것도 도이고 저것도 도이다’ 이러면서요. 

내가 첫 경계가 나서 전국을 다닐때를 회고해보면.. 내가 체험한것도 너무 탕탕무애해서 우주 전체가 다 나여서 걸릴게 없고 두려울게 없어요.  분명히 이치상 그렇지만, 오염되어 있는 내가 다시 마음 작용을 보면, 정말 나의 마음 작용의 뿌리까지 탕탕무애 하냐면 아니예요.  그건 자기 스스로 압니다.  하지만, 양심을 속여버리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공부했네 하고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사들이 그렇게 하지말라고 경책을 했음에도 중생의 질긴 허세, 아상(我相), 만(慢), 증상만(增上慢,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척 하는것)때문에 그렇습니다.  법화경 방편문에 보면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려 하자 5천명의 제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는데 부처님께서 그들을 증상만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 말법(末法) 시대라 증상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여기저기 부지기수 입니다.  산중이나 저작거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들 가운데, 계율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건 마구니입니다.  오죽하면 용성스님께서 설사 도인이라 할지라도 계율을 지키지 않거들랑, 막행막식(莫行莫食) 하거들랑 그 사람을 따라서는 안된다고 했을까요?  그렇게 위험한 겁니다.  독(毒)중에서 아주 무서운 독인겁니다.  적어도 보현사 선방모임에 오시는 분들은 그런 기본자세, 어떤 신심(信心)이야되고, 어떤 마음자세야 되야한다는 것은 아주 잘 되어 있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원(願)으로 정법(正法)을 수행할 수 있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108 참회문을 그리하고 있잖습니까?  그게 주제가 되지 않으면 무수하게 전세계에 널려 있는 외도(外道)들과 사도(邪道) 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전생을 보기만해도 공부를 다 마친것처럼 그렇습니다.  자기의 전생은 과거에 찍혀있던 필름입니다.  우리가 묵혀있던 사진첩을 보게 되면 그냥 추억하는 정도이지 그걸 보면서 우리가 자유로와지고 행복해 지던가요?  똑같은겁니다. 과거생의 자신이 찍혀 있는 그것을 좀 본것이 뭐라고 거기에다 가치를 둡니까? 

일상에서 타성에 젖을려고 하고, 자꾸 뒤로 미룰려고 할 때, 스스로 경책해서 한번 더 참선곡을 보고 한번 더 108배를 해면서 나를 볼려고 해야 합니다.  귀찮더라 해도 선방 도반들과 모여서 공부하는 자리에 참석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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