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선사의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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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7-06-14 13:35 조회23,50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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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 혜월, 만공스님은 경허의 세 달로 불리우지요.
지난 번 혜월스님에 이어, 이번엔 만주의 상현달로 불리는 수월선사(水月禪師·1855~1928)의 이야기를 전해 드릴까 합니다. 스님은 한국불교 근대사에 아주 빛나는 분이 틀림 없음에도 기록이 거의 없어,선방 수좌스님들께 간간히 구전되어 오는 분입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며 살던 중에 어느 날 하룻밤을 묵어간 탁발승에게서 수행 이야기와 경허스님 얘기를 듣고 감명을 받아 28세 때 서산 천장암을 찾아 갔답니다.
그러니까 글을 모르던 그를 수행자로 만들어 준 스승이 바로 경허(鏡虛·1849~1912) 스님이신데, 큰스님은 스님에게 오직 한 가지 "대비주다라니"만 시키셨답니다.
그런데 경허 큰스님을 지극히 믿고 따른 혜월스님은, 나무하고 물긷고 밭일 청소하는 내내 오로지 일념으로 다라니를 지송하기를 삼매를 이룰 정도로 하셨답니다. 그러던 중에 여러번 방광을 내셨던 일화는 저도 선방에서 들었던 이야기지요.
수월 스님은 천장암에서 깨달음을 이룬 뒤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 묘향산에서 수행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스님께서 계시던 암자에서 불기둥이 솟는 듯한 ‘방광(放光)’이 여러 차례 일어나, 마을 사람들이 산에 불이 난 줄 알고 삽이랑 도구를 들고 쫓아 올라 온 일도 있었답니다.
글을 모르시는 스님은 설법이 아니라 수행과 법력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킨 일이 만주 간도 일대에는 전설처럼 내려 온답니다.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경허 스님을 찾아 함경도 갑산으로 들어간 그는
스승이 세상을 뜨자 그 소식을 만공 스님에게 알린 뒤 두만강을 건너 행적을 알리지 않았답니다..
1910에서 20년대 이야기.
독립군과 조선인이 많이 넘나 들던 어느 고갯 길 옆 움막같은 집에 사셨던 스님은 주먹밥을 뭉치고 짚신을 삼아 들판과 길목에 놓아 두곤 했단다.
배가 고파, 혹은 잃어 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는 조선 사람이 먹고 그리고 신고 가라는 뜻에서...
그러니까 스님께선 여전히 낮에는 밭갈고 나무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거나 주먹밥을 뭉쳤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대비주(大悲呪)삼매에 드시고...
만주의 마을들이 기르던 ‘만주개’는 몹시 사나웠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서면 떼로 달려들어 물어 죽이기도 하니,그 일대는 그래서 밤길 다니는 것이 공공연한 금기였다.
그러나 선사께서 나타나시면 그 개들이 믿기지 않을만큼 그냥 얌전히 따르며 꼬리를 흔들었고, 까치 꿩 노루 토끼 같은 산짐승 날짐승도 모여들었다.
위 이야기는 수월 선사께 가르침을 받고자 먼 길을 달려갔던 몇 안되는 스님 중 한 분이신 청담(靑潭) 스님이 전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댓글목록
지선행님의 댓글
지선행 작성일글을 모르시는 스님께선 불경이나 불법에 관한 책을 접하지 못하셔서 지식을 구하는것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의 가르침에 한점 의문없이 지극한 믿음으로 대비주 다라니 만을 일념으로 지송하며 선수행을 하셔서 깨들음을 얻었다 하니 평소 불경이나 불법에 대해 지식이 거의 없어 공부가 힘들다 핑게를 일삼던 게으름의 꼬리에 불을 붙임니다. 꽁지가 빠질지경으로 열심히 달려 정진수행에 일념하라는 스님의 가르침의 한수 잘 받들겠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