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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30, 마음을 내어 생각을 일으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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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5-30 17:49 조회4,1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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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즉시 법체(法體)와 어긋나고, 모양(相)에 집착하게 된다.

  

#사족(蛇足) - 어리석은 이들은 한 생각 잘못 일으키는 순간, 생사에 함몰되고 만다. 중생의 한 생각 한 생각은 생멸의 반복이어서, 무명에 뒤덮여 본질을 잃는다. 이것은 금생의 일만이 아니다. 과거 생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지냈던 것이다.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나면, 어느 날 홀연히 마음의 눈을 뜨는 기회를 가진다. 그렇게 전과는 다른 상태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인연을 맺는 것이다. 

 

많은 중생은 공부(보리도)를 하면 만사형통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는 줄 착각한다. 그것은 인과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표주박은 물결이 일면 이는 대로 덩달아 흔들리고, 물결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미 지어놓은 원인에 대한 결과가 일어났을 때, 표주박과 같이 흐름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내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세생생 어둠에 빠지지 않고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무시(無始) 이래로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다. 시작함이 없는 옛날부터 차제를 밟은 부처란 없다.

#사족(蛇足)- 육도 만행은 여섯 가지 수행으로 육바라밀이라고도 한다. 이 여섯 가지를 잘 닦아야사 부처가 된다고 여기고, 삼아승지겁을 내내 수행을 닦아 나아가 성불 하는 것을 곧 차제라는 말이다. 차제란 일종의 차등과 단계 등의 뜻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보살 10지 단계, 52 수행지위 등이다. 

이 법은 중생의 신심정도와 보살도의 원력과 그 성취 정도의  근기에 따라 개설한 방편법이지, 부처의 마음 자체와는 상관없다. 그런 배움을 가지고 중생들은 또 덜 닦은 사람, 모두 닦은 사람 등 차별심을 둔다. 이는 원래 비어서 닦을 것이 없는 부처의 마음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여하튼 난행, 고행 끝에 부처가 된다는 말도 나름 이유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방편으로 한 말이라는 점을 투철히  알아야 한다. 그 정도의 근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먼저 점점 나아지는 차제를 두고 점차(漸次)를 보여줘서 믿음을 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법화경에는 그것을 친절한 비유로 묘사해 놓았음). 

그런 방편은 마침내 시절인연이 도래하였을 때, 한 생각 돌이켜 본래 부처였음을 자각토록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부처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평등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한마음을 깨치면 다시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법이 없으니, 이야말로 참된 부처다. 부처와 중생은 모두 한 마음으로 다를 바가 없다. 허공과 같아서, 잡됨도 무너짐도 없다. 마치 태양이 온 누리를 비추는 것과 같다.
 

#사족(蛇足)- 허공은 그 자체가 너무 맑고 투명하여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같이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이 허공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허공, 현재 허공, 미래 허공이 따로 있지 않다. 동쪽 허공, 서쪽 허공도 따로 있지 않다. 

허공은 투명하여 본래 색이 없지만, 인연 따라 이런저런 구름의 모양이 만들어져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그 모양에만 집착하여, 구름의 실체가 있는 줄 착각하게 된다. 그것을 즉시 깨닫고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본래 내려 놓을 것도 없는데 짊어지고 있으니까 내려 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그럼 짊어지고 가라고 한다. 짊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것을 알게 된다. 그 때, 내려놓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활짝 눈을 열게 된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일찍이 밝은 적이 없다. 해가 져서 온 천하가 어두워질지라도, 허공은 한 번도 어두운 적이 없다.
밝고 어두운 경계 바뀌어도 허공의 성품 변하지 않는다. 마음·중생·부처 차별 없듯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되니·안되니’ 하며 밖에서 구하고, 욕심 지나쳐 본심을 등진 것이다.
 

#사족(蛇足)- 허공 스스로는 밝아지거나 어두워진 적이 없듯이, 사람의 마음도 밝거나 어두움에 아무 관계가 없다. 인연 따라서 밝아지니까 밝아진 것이고, 어두워지니까 어두워진 것일 뿐이다. 밝음에 더 이상 머무르거나 집착할 필요가 없다. 다만 밝음과 어두움에 관계없이 마음을 쓸 줄 아는 방법을 확인했으면 그만이다. 


털처럼 많은 이들이 지견 구해도, 도를 깨친 이는 뿔처럼 드물다. 보현행이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치로 말하는 소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다.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다.

#사족(蛇足)- 〈화엄경〉에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고 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단지 부처, 중생,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 구분을 지을 뿐,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는 그것보다 더한 것이 뒤엉킨다 하더라도 결코 분별하지 않는다. 허공이 온갖 구름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허공 본래의 모습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것처럼, 부처와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바탕인 체성도 비록 수없이 많은 그림자를 그려낸다고 해도 그 본래의 모습은 둘이 있을 수 없다. 허공은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니듯이, 부처와 중생 또한 그 바탕은 같다는 뜻이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청정하고 광명한 해탈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중생을 관하면서 더럽고 어두우며 나고 죽는 모습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겉모양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다시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심체(心體)를 깨닫지 못하니, 다시 마음에서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부처를 구하며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악법이지 깨달음[菩提]의 도가 아니다.

#사족(蛇足)-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깨닫고 못 깨닫고의 차이다. 자기를 제대로 알아 깨달으면 부처요,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이렇게 간단하다. 자기가 부처인 줄 알고 부처의 행을 실천하면 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중생이 되어 괴로워하며 분별한다. 

한 생각 돌이켜 바로 ‘이것이다’는 것을 깨닫고 미련 없이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 밖에서 찾고 구하려 하면서, ‘되니, 안 되니’를 따지니 또 다른 허물을 만들어내고 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믿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분수를 알고 만족한다면 넘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지나친 욕심을 내니, 본심을 잃기가 십상인 것이다.

 

여여한 본체가 안으로는 목석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도 없고, 방위와 처소도 없다. 또한 모양이나 자태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의지해서 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서다.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대개 널리 지견(知見)을 구하는 것이다. 자고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 이는 뿔같이 드물다. 


#사족(蛇足)- 목석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는 무심도인의 경지를 그대로 말한 것이다. 아예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입장에서는 두려울 것도 없지만, 눈은 열었는데 아직 애매모호한 것이 남아 있는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해가 되는 것만큼은 감당할 수 있는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자꾸 다가오면 당황하여 아찔한 생각에 벼랑 끝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급한 마음에 이치를 구하게 된다. 하지만 완벽하게 다 벗어던진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일어나든 않든 전혀 상관이 없다. 도를 깨친 사람은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은 이치에, 보현보살은 실행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실로 텅 비어 걸림 없는 도리이고, 실행이란 상(相)을 여위고 끝없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사족(蛇足)- 안목을 열어서 원만 구족한 모습을 스스로 살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보현보살의 삶과 같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이는 하루 종일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보현행원을 한다 하더라도, 아직 상(相)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작하는 일이다. 그 정도 근기의 사람한테는 ‘바라밀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맞다. 그러나 이미 그 수준을 능가한 힘을 가진 사람한테 ‘해라, 말아라.’ 하는 것은 마치, 이미 길을 환희 다 아는 사람한테 굳이 가이드를 고용하라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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