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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13, 보고 듣고 아는 것(見聞覺知)에 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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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6-11 17:36 조회13,605회 댓글0건

본문

성품은 늘거나 줄지 않으나

인연따라 천차만별 모습
끊임없이 나투면서도
본래면목은 여여부동


본원청정심은
법계 평등하여 상相이 없고
항상 밝아 두루비춘다

‘견문각지見聞覺知’로 마음 삼으면
그것에 덮여 본체 못본다
‘견문각지’ 텅 비워 버리면
즉시 마음길이 끊어져
종횡자재 도량 아님이 없다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보탤 것이 없다.
성품은 늘거나 줄거나 하는 모습이 아니다. 성품이 변화해서 부처도 되고 보살도 되고 성문ㆍ연각ㆍ벽지불도 된다. 모양이 있는 것도 되고, 모양이 없는 것도 된다.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일체처 일체시에 끝없이 나투면서도, 나투되 나툰 바 없이 늘 여여부동한 본래면목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다만, 어리석은 곳에 빠져서 허망한 시간을 보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더라도 본래 마음자리는 둘이 될 수 없어서 늘 여여한 모습임을 믿어야 한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우리의 모습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고 선악을 떠난 또 다른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이 다 그림자인 것을 알되, 허상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지 않고 지혜롭게 쓴다면, 보다 좋은 인연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깨닫고 난 뒤에 지난 오랜 세월의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실로 얻은 것이 없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다.
본래 성품자리는 얻었다 할 것이 없다. 다만 깨달음과 늘 더불어 살았는데, 허망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것이다. 늘 그 성품 자리에서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지녔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셨지, 억겁의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 아니다. 수기를 받으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서 수기를 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지니고 연등부처님께 증명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들 사이에 수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일체 모든 중생들도 부처와 둘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를 이루는 것은 억겁의 세월 동안 노력해야 하는 것이므로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현애상(縣崖想)을 낸다면 그것은 오해한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보리(깨달음)라 한다.”고 하셨다.
본래 성품자리에는 멀고 가까움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깨닫고 말고 할 것이 없는 본래면목 자리를 등지고 살다가, 그 입장을 한 바퀴 전환해서 늘 함께 했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제대로 공부한 것인지 아닌지 갈등이 적지 않았는데, 인연 따라 믿음이 커져서 이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가르침을 돌이켜보니까 그 까닭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본원청정심은 중생과 부처세계, 산하대지, 모양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시방법계가 다 함께 평등하여 너다 나다 하는 상(相)이 없다.
일체가 과거 현재 미래에 관계없이 성품의 바다여서, 이 일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한 적이 없다. 그나마 안목이 바뀌어 듣는 힘을 지니게 된 배휴이기 때문에, 황벽스님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눈뜨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런 설명이 아니라 근본문제를 직접 해결하도록 하는 입장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 본원청정심은 항상 뚜렷이 밝아 두루 비추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여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으로 마음을 삼고, 그것에 덮이어서 끝내는 정밀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의 근원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다. 뚜렷이 밝고 두루 비추어 만물을 제대로 구별하는 마음 바탕이 바로 성품이다. 다만 견문각지 하는 것에 마음이 가려져서, 견문각지 하게 하는 그것을 놓치는 것이다. 아주 미묘한 것이지만,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엄청나다. 본인 스스로가 벗어나지 않고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당장 무심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견문각지만을 인지하며 행하고 움직이지만, 이 견문각지를 텅 비워 버리면 즉시 마음 길이 끊어져서 들어갈 곳이 없어진다.
무심하기만 하면 즉시 근본이 드러난다. 그런데 본래 마음자리는 등진 채, 견문각지 하고 있는 이것이 마음이라고 착각한다. 마음을 작용시키는 그 찰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날 때의 찰나를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벽이 깨지면서 비로소 시절인연이 열리는 것이다. 텅 비워버린다는 것도, 따로 어떻게 비운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다. 공부의 맛을 좀 봤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쉽지 않다. 내버려 둔다는 말은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말이다. 공부할 때의 입장은 그렇다 쳐도, 공부한 후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이런 말을 소화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힘들다고 하는 그것이 힘든 것이므로, 그것도 내려놓아야 한다. 


다만 견문각지 하는 곳에서 본심을 인식할지라도,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 있지도 않다. 견문각지 하는 가운데, 견해를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마음을 찾아서도 안 되고, 견문각지를 버리고 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 그리하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하여 어느 곳이든지 도량(道場) 아님이 없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다른 마음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으면 안 된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성품과 함께하는 청정도량이다. 늘 청정도량에 머물면서 방편을 세워야 한다. 있는 도량을 등지고 없는 도량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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