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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27, 허상과 실상 그리고 전도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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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6-26 17:19 조회2,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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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번뇌 없애기 위해 잠시 빌려온 ‘약’

마음이 없는데 일체 법이 어디에 붙겠는가?
본래 청정한 부처위에
한 물건도 덧붙이지 말라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다. 또한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허공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다.


법신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다. 허공과 법신이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부처와 중생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생사와 열반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번뇌와 보리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다.
일체의 모양 가운데 모양을 여읜 실상이 있다. 허상을 버려야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허상과 실상이 함께 있다.  허상에 끄달려서 실상을 놓치고 따로 찾고 구하면 안 된다. 허상 그대로가 실상임을 알아야 한다.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공부인은 마음을 취하나,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 참된 법이다. 경계도 마음도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내려놓는다고 하지만, 내려놓고 내려놓지 않고에 관계없이 본래 내려놓은 것이다. 따로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도 허물이 된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란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잡을 곳이 없을까 두려워해서다. 이는 공이 본래 공이라 할 것도 없고, 오로지 한결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마음은 잊을 수 있고 없고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이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은 비롯함이 없는 옛날부터 허공과 수명이 같아서, 일찍이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일찍이 있은 적도 없은 적도 없다. 진공은 있고 없고의 모습이 아니다. 공 이전이다. 이를 도저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가운데 무언가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부처, 마음, 열반, 불성 등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일찍이 더럽거나 깨끗한 적도 없고, 시끄럽거나 고요한 적도 없으며, 젊지도 늙지도 않고, 방위와 처소도 없으며, 안팎의 구분도 없다. 수량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색상도 없고, 음성도 없다. 그러므로 찾을 수 없고, 구할 수 없으며, 지혜로써 알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대상으로서 파악할 수도 없고, 또한 애써 노력한다고 해도 이를 수 없다.
그 자리에는 지혜로도 다다를 수 없다. 지혜조차도 허물이 되기 때문이다. 지혜라는 것도 번뇌를 없애기 위해 잠시 빌려온 약일뿐이지, 본래는 병도 약도 없는 것이다. 본래 그림자도 없는 것이지만, 그림자가 있는 줄 아는 사람에게 짐짓 없앨 수 있는 수단을 보여주고 거기에 잠시 머무르게 했을 뿐이다. 그림자가 없어진 뒤에는 수단까지 버리도록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사람들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이것이 경계는 벗어났어도, 마음에 집착하여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를 가지고 다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법을 가지고 다시 법을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당장에 무심하여 묵연히 계합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면 곧 어긋난다. 알면 이렇게 되지만, 모르면 일부러 이렇게 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부른다. 


어떻게 해야지 이렇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르다보니, 말 배운 대로 이치로 받아들여서 거기에 머물게 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이것이 정견이니, 밖으로 경계를 쫒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자식으로 잘못 아는 것과 같다.
전해야할 어떤 마음이 있어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되 준 바 없이 주고, 받되 받은 바 없이 받는 것이다.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일체 모든 대대(待對)가 끊어진,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 일련의 일들을 소화해야 한다.

 탐·진·치가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신 것이다.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는가? 탐·진·치 삼독이 계·정·혜 삼학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것도 제도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본래는 제도해야 할 모습이 따로 없다. 그래도 중생에게 어리석음이 있다고 해야 믿음을 내는 사람을 위해서, 제도할 것을 전제하고 단계를 시설해서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자리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 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늘,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본래 청정한 부처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덧붙이지 말라.
아무리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줘도, 중생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덧붙이려 한다. 덧붙여지든 덧붙여지지 않든 다 소화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 어떤 변화가 와도 툭 터진 허공과 같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조그마한 가시가 박혀도 견디지 못하고 뒤집어질 것이다. 그래서 공부는 선지식의 지도 아래 도반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전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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