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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27, 마음을 잊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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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6-27 14:25 조회2,1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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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다
‘있다·없다’ 양변을 여의면
곧 법이 드러난다

중생은 인연따라
무명(無明)을 두텁게 한다
‘적적성성(寂惺-지극히 고요하면서 맑고 또렷하고 선명한 상태)'

‘견문각지(見聞覺知-보이고 들리는 것을 지각하고 아는 상태)’는
하근기(下根機) 위한 비유 설법

 이것은 마치 허공에 수없이 진귀한 보배가 장엄될지라도, 마침내 유지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된다 하더라도, 끝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성에 미혹하여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본래 청정한 부처에게 한 물건도 덧붙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치 아무리 귀한 보배구슬일지라도 허공에는 머무르게 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보배구슬에 한눈팔면, 허공 같은 본성을 못 보고 더 미혹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에 의지하여 건립된다는 말이다.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청정한 성품 위에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소위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하다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나 ‘견문각지(見聞覺知)’ 등의 말은 모두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다.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
심지법문이란 마음이 만법의 근원이라는 뜻에서, 만물이 대지에서 생성되듯 만법이 마음자리에서 생겨남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 마음자리는 본래 청정하므로, 새삼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붙일 필요가 없다.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적적성성’이니 ‘견문각지’니 하는 쓸데없는 견해나 지으면서 공부에 장애되는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에 얽매인 것이다. 법이 떨어지는 곳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있다는 생각에 떨어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진실 된 법이란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에 속하지 않는다. 이 양변의 견해만 여의면, 곧 법이 드러난다.

9월 1일 황벽선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달마스님께서 중국에 오신 이후로, 오로지 ‘한 마음[一心]’만을 말씀하셨고 ‘한 법[一法]’만을 전하셨다. 또한 부처에서 부처로 전하실 뿐 다른 부처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법에서 법으로 전하시고 다른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법이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며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로서, 곧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다. 오직 이 하나만이 사실이고, 나머지는 진실이 아니다.
오직 한 마음, 한 법, 한 부처만이 진실 될 뿐인데, 그것은 본래 청정한 이 마음이다. 나머지는 참됨이 될 수가 없다. 역대 불조께서 전등해온 법이란 오직 한 마음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반야는 지혜라는 뜻으로서, 이 지혜란 곧 무상(無相)의 본심이다. 범부는 도(道)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六情)만을 함부로 하여 육도(六道)를 떠돈다.
내가 늘 노래하듯 하는 말이다. 존재나 현상에 대하여 입체적으로 투명하게 근원과 지말을 같이 살펴보는, 직관과 통찰의 힘을 반야라고 한다. 깨닫지 못한 중생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 흘러나오는 인연 따라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며 무명을 두텁게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사를 헤아리면 곧 마구니의 길에 떨어지고, 한 생각 여러 견해를 일으키면 곧바로 외도에 떨어진다. 또한 생(生)이 있음을 보고 멸(滅)하려고 하면 성문도(聲聞道)에 떨어지고, 생이 있음은 보지 않고 오로지 멸만 보려고 하면 연각도(緣覺道)에 떨어진다.
한 생각 출몰하는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면, 성문에 떨어지는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라고 하니까, 늘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인 줄 알고 거기에 머무르기 쉽다. 그것은 성문에 떨어지는 것이다. 관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식관, 자비관, 부정관과 같은 것들이 모두 참다운 공부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편이어서, 이에 머무르면 대승의 눈을 뜨기에는 역부족이다.

법은 본시 생하지도 않고 또한 지금 멸하지도 않는다. 이 두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야 한다.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한 마음인데, 이것이 불승(佛乘)을 이루는 것이다. 범부는 모두 경계를 쫓아 마음을 내므로, 좋고 싫음이 생긴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 마음을 잊어야 하고,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텅 비며, 경계가 비면 곧 마음이 없어진다.
〈원각경〉 ‘보안보살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환(幻)인 몸이 멸하면 환인 마음도 멸하고, 마음이 멸하면 경계도 멸하고, 경계가 멸하면 환의 멸도 멸하고, 환의 멸도 멸하니 환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에 나가 떨어져, “이 마음이 바로 그 마음과 같은 것이어서, 또 다른 마음을 가져다 쓸 것이 없다.”는 식으로 분별하면, 연각승에 머물러 조그마한 깨달음은 얻을지언정 보살이상의 큰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잘 살펴야 한다.

만약 마음을 잊지 않고 경계만을 없애려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고 어지러움만 늘어날 뿐이다. 고로 만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그 마음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일체 만법이 다 마음으로 인연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을 떠나서 만들어진 것이란 있을 수 없다. 홀연히 축착합착(築著?著) 계합될 때, 얻고 못 얻고 할 것이 본래 없음을 눈 열 것이다. 하지만 깨달았다 하더라도 확실하지 않거나 경계에 집착해서 한 번 더 느껴보려고 든다면, 모두 다 공부에 방해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방해도 일단 공부를 했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방해 받든 말든 상관없는 불퇴전의 입장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모두 내려놓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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