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4, 성불을 믿지 않는, 믿음이 없는사람 천제(闡提) > 선방모임


이 뭣꼬!
선방모임

선방모임

JUL/4, 성불을 믿지 않는, 믿음이 없는사람 천제(闡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7-14 13:28 조회2,091회 댓글0건

본문

여기서 가까이 있다 함은  

거리가 없는 가까움이다
멀다면 우주보다 멀고
가깝다면 눈보다도 가깝다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을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 된다


꼭지가 말라 비틀어지면
살짝 건드려도 툭 떨어지나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따면 꼭지 덜 떨어져
계속 흔적을 남기고 다닌다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자기가 지은 복덕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보배의 장소[寶所]’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이 이미 화성(化城)이라면, 어느 곳이 보배의 장소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의 장소는 가리킬 수 없다.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의 장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 거리가 얼마라고 정해서 말할 수 없으니, 오로지 당체에 계합할 뿐이다.
가까이 있다고 하지만, 멀고 가까움이 없는 가까움이다. 동시에 멀다면 우주보다도 멀고, 가깝다면 눈[眼]보다도 가깝다. “자기 안에 있다.”고 전해 들었어도, 이치로만 알고 실제로 알지 못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찾고 구하게 된다. 이미 완벽하게 구축된 사실을 알면, 찾고 말고의 일이 아니라는 입장 정리가 이루어진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찾아야 한다.”는 어지러움을 범할 수밖에 없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육도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불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일천제(一闡提)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열반경》에서는 일천제도 종국에는 성불한다고 했다. 천제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부처될 수 없다.”며, 불과(佛果)를 믿지 않는 중생들이다. “누구나 부처될 수 있는 인(因)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철두철미한 계합을 통해 형성되어야 하는데, 천제는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보살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과 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라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은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개 법(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心)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비록 영겁 동안 수행을 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가 될 수는 없다.
본래의 부처는 수행을 가지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모습이 있는 동안에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수행한다.”는 생각만 불러 일으켜도 어리석어진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을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돈오하는 순간에 “이것이다!” 하는 것을 확인하면 그뿐인 것을, 사람들은 늘 찾아다닌다. 꼭지까지 말라비틀어지면, 살짝만 건드려도 툭 떨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따려고 덤빈다. 그러니 꼭지가 덜 떨어져서 계속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경계로 인해 마음이 장애되고, 현상(事)으로 인해 본체(理)가 장애되고 있다. 그래서 늘 경계로부터 도망침으로써 마음을 편히 하고자 하고, 현상을 물리침으로써 본체를 보존하고자 한다.
흔히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계가 다 마음을 방해하는 그림자여서, 없애버려야 내 마음이 편하고 분별을 덜 할 것이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조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런 어른거리는그림자를 알아차려 살피면(=각찰覺察) 그만이다. 

 

대개 사람들은 “공부가 되었다면, 일어나는 생각을 없애고 끄달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 “없애려 해도 없애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안 된 것이다.”며 스스로 분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그대로 지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앙금이 남아서 자기도 모르게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무명과 합쳐져서 다시 태어날 때 허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내려놔서 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시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공부가 안 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면, 돈오할 생각은 없이 비우는 것에 몰두한다. 하지만 공부된 사람은 그러려니 하며 점검해 마칠 줄 아는 여유와 힘이 있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고 하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려고 하면서도,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는다.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무상(無相)을 눈뜨고 공부할 수 있는 인연에 나아갔기 때문에, 경계든 마음이든 다 버릴 줄 안다. 불법에 눈뜬 자가 아니면, 보살이 공부하는 모습을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것을 불보살만 들을 뿐, 보살지견을 눈 열지 못한 제자들은 설사 혜안을 눈 열었다 하더라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업식이 적고 믿음이 큰 사람들은 내려놓는 순간에 그 말뜻을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줄 알고 자꾸 생각에 생각을 불러일으켜서 어지러워진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일요 법회 : 매주 일요일 오전 10:30 AM
선방 모임 : 매주 수요일 저녁 7:00 PM
불교 대학 : 매주 화요일 저녁 7:00 PM부터
1130 Abrams Rd, Richardson, TX 75081     Tel : 972.238.8005
COPYRIGHT ⓒ 달라스 보현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