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11, 허공에 도장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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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7-14 13:58 조회14,8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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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 지은 "염화미소!"
부처와 우리가 다름없음을
철두철미하게 알 때
이미 마음 전해 받은 것
허공에 도장 찍으면 남지않듯
새가 종일 날아도 흔적없듯
‘확철대오’로
내려 놓으면 그만
구름이 허공 떠날 수 없듯
법신은 홀연히 일어나
천차만별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큰 버림[大捨]’은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려 허공과 같아져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다.
‘중간 버림[中捨]’은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대가를 놓아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작은 버림[小捨]’은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 바라는 바도 있다가, 마침내 법을 듣고 공(空)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큰 버림은 밤길을 가는데 마치 등불이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다.
중간 버림은 등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다.
작은 버림은 마치 등불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린 것이다.
버려서 버린 것이 아니다. 다만 취하지 않을 뿐이다. 취하고 버림을 다 놔버렸는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나. 버림에도 입장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한 생각 돌이켜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근본 자리에서 버리되 버린 바 없는 버림으로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한 이래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인가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다고 하지만, 전해준 것도 전해 받은 것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모양이 있어야 전해주고 전해 받을 수 있지만, 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이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아 분명해졌고, 가섭존자도 부처님 만나서 깨닫고 난 뒤에는 그 길을 분명히 봤기 때문에 법을 부촉 받은 것이다. 이것을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하는 것이지, 부처님께서 꽃을 드니 가섭이 빙그레 미소 지은 것에 천착하는 것은 군더더기에 나가 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만, 무엇으로 인연해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 깨닫지 못하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근본 성품은 부처와 우리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알 때, 마음을 전해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런 무늬도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건에다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찍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도장을 안 찍는 것이 아니다. 찍긴 찍되 허공에 찍기 때문에,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모습을 수용한다. 그것은 변화했다고 할 수도 없고, 변화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부처님의 마음이나 내가 쓰는 마음이 둘이 아니지만, 업이 달라서 서로 다른 작용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업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늘 그러한 것이므로, 수미산 같은 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한 생각 돌이키는 순간 부처님께서 깨달은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이다. 새가 하루 종일 날아도 흔적이 없듯, 확철대오 해서 내려놓으면 그만인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끌고 다니니, 거북이가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꼬리로 쓸지만 다시 그 흔적이 남는 것과 같은 꼴이다.
도장 찍음[能印]과 도장 찍힘[所印]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구름이 아무리 나타나고 변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모두 허공에 의지해서 벌어지는 일이지, 구름은 한 번도 허공을 떠난 적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그러나 마음은 무심(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得]도 얻었다 할 것이 없다.
〈반야심경〉의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이다. 근본 실상을 돌이켰을 때,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와 대상이 본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분별하는 모습이 얻었다고 좋아하고 잃어버렸다고 싫어하는 경계를 만들지만,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투철하게 알아서 허망한 기운에 끄달리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는 삼신(三身)이 있다. 법신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은 일체 청정한 법을, 화신은 육도만행 법을 말한다.
부처님께 세 몸이 있다는 말도 허망한 소리다. 부처라는 말도 방편으로 붙인 이름인데, 부처를 나눠서 삼신사지(三身四智)를 말하는 것은 실로 허망한 소리다. 근본 실상의 모습은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해서 남거나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공연히 어떤 모양을 그리면서 어떤 형태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음성·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하는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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