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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18, 우주 법계가 온통 부처님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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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7-14 14:21 조회1,9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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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 법계가 온통  

‘부처님 설법’ 

 

눈뜬 입장선 일체처 일체시에
부처님전에  불공 드린다

 

일정명(一精明-한마음)과 6화합
알음알이로 이해하면
법에 속박돼 계합 못하고
깨달았다는 상에 빠진다
 

계합하여 성품을 깨닫는
사람은 즉시 부처에 이른다


충만한 법계의 살림살이가 다 부처님의 설법을 대변하고 있다. 진정한 부처님의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한 법신자리에서 홀연히 움직임이 벌어지는 것이어서, 눈뜬 입장에서는 따로 설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말로 설해야 설법인 줄 알기에, 따로 모습을 빌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쓰기도 한다.


아무리 그림자를 없애주기 위해서 입을 열지라도, 결국 그것이 또 다른 그림자를 일으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신자리에서 화현되어진 일체 모든 그림자는 다 법을 설하는 모습임을 알아서, 일체처 일체시에 부처님을 보고 불공드릴 줄 안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상황에 따르고 근기에 대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과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방편으로 3신을 보이면서 믿음을 내게 한 다음, 보신이나 화신은 참다운 실상이 아님을 밝히면서 오직 법신 도리만을 긍정한다. 하지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근사치로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성품의 바다에서 어떤 변화도 비출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살필 때, 법신이 가리키는 바를 볼 수 있다.

이른바 하나의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6화합이라고 한다. 6근이 하나로 이어졌다가, 어리석으면 여섯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알면 둘 아닌 성품 자리에서 중심을 잡지만, 모르면 쪼개진 여섯을 자기 집으로 삼아 자기도 모르게 생사를 반복하며 윤회할 뿐이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六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六塵)과 합한다.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각각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六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알고 보면 청정법신의 인연에 의해 합성된 그림자가 18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 공한 것이다. 일체 모든 것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그 원인 제공자를 알 수 있다. 원인과 결과를 만들기 이전의 참다운 실상이 어떤 것인지 자각할 때, 일정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로 이해해서 마침내 법에 속박되어 본래 마음과 계합하지 못한다.
이치만 따지면서 분별하는 사람은 교리는 이해했어도 계합이 안 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아있다. 그러면서도 배우고 이해한 것만으로 깨달았다는 상에 빠져 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상없는 도리를 밝히면, ‘상’과 ‘상 아님’을 동시에 보아 헐떡거리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설하셨지만,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6년 고행과 45년간의 쉼 없는 설법을 찬탄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부처님을 비방하며 스스로를 고통의 바다에 빠트리는 모습인 줄 알아야 한다. 위대한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모양에 집착하거나, 반대로 집착하지 않는다는 증상만을 지어서도 안 된다. 참다운 공부인이라면, 공부가 될수록 스스로의 부족한 모습을 알고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분이 된다. 이는 중생을 위하여 널리 묘법을 베푸는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일승 도리로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할 수 없이 차별된 근기에 맞추어 삼승을 열어 보인 것이다. 단계 별로 각각의 근기에 맞는 설법을 통해서, 일승 묘법으로 나아갈 수 있게 방편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법이 아니다.
깨달음 자체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근기 따라 우열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깨달으면, 최상승까지도 쓸어버리고 유아독존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도리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보지 않고서는, 이 말을 소화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이승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일심법(一心法)’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며 따로 언설(言說)을 떠난 ‘한 마음’을 부촉하셨다.
부처님과 가섭은 서로 주고 받았지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귀신도 이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직접 깨달았을 때, 비로소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맥의 법령은 따로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즉시 불지(佛地)에 이른다.
성품을 깨닫는 즉시 바로 부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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