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25, 道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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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7-14 14:55 조회9,6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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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는 깜깜한 밤에 물을 뿌리면
스스로 높고 낮음 따라 가는 것
‘法’이 대체 무슨 모양이더냐?
깨닫는 순간 내려 놓으면 그만
‘내려 놓으라’도 어리석은 말
“이 법은 허공과 같습니까”
“허공이 언제 같다거나
다르다고 말하더냐”
공부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법을 설한바 없이 설하고
들은바 없이 듣는 모습이다
배휴가 물었다.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대사께서 대답하셨다.
“도가 무엇이기에 수행하려 하느냐?”
“제방의 종사가 서로 계승하여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둔근기(鈍根機)를 이끌어 주는 말이니 의지할 것이 못된다.”
도를 깨닫고 난 뒤에도, 배휴에게는 아직 근심이 남아있다. 여태까지 닦으려고 노력하다가 황벽 스님을 만나서 몰록 돈오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서 묻는 것이다. 그런데 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소화를 못하고 황벽스님께 계속 묻는다. 황벽 스님은 분명하게 대답을 해줬음에도, 배휴는 아직까지 닦아야 한다는 습관이 떨어지지 않아 이해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닦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인과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도는 마치 깜깜한 밤에 물을 뿌리면, 아무리 어두워도 물 스스로가 높고 낮음에 따라 알아서 가는 것과 같다. 일부러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둔근기를 위한 말이라고 하신다면, 상근기(上根機)를 위해서는 무슨 법을 설하시는지요?”
“상근기라면 어디 남에게서 찾으려 하겠느냐? 저 자신도 얻지 못하거늘, 어디 구미에 맞는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경전 중에 이르기를, ‘법이라고 하는 법이 대체 무슨 모양이더냐?’고 한 말씀을 보지 못했느냐?”
‘무사자오(無師自悟)’라고, 눈 연 다음에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 ‘아라한과’만 증득해도, 스승으로서의 눈높이를 갖춰서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배휴는 아직까지 꼭지가 덜 떨어져서 자꾸 묻고 있다. 답을 얻어 하라는 대로 수행해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도는 닦아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깨닫는 순간에 ‘이것을 등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만 확인하고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내려놓으라’는 말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갖다 붙인 어리석은 말이다.
도 닦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대각(大覺)에 들기 위해 '보다가야'에서 고행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 정도 근기에 있는 사람에게 신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난행, 고행’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닦아서 증득해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는 것은 그 때의 인연이고, 닦음을 가지(加持-더하거나 지속함)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 때의 인연이다. 이런 것이든 저런 것이든 어떤 말도 소화해 내지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훤칠하면 흔들릴 것이 없다.
“그렇다면 도무지 구하여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의 수고로움을 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단절되어, 무(無)가 되지 않겠습니까?”
“누가 무가 된다고 하였으며, 또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너는 찾으려 하느냐?”
그냥 온통 그러한 이 일 이외에는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끊지도 말라 하십니까?”
“찾지 않으면 바로 쉴 뿐인데, 누가 너더러 끊으라 하였느냐? 눈앞의 허공을 보아라. 어떻게 저것을 끊겠느냐?”
끊어야 할 것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허물이다.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아 아느냐 모르느냐가 관건이다. 모른다고 해서 찾고 구하는 것도 허물이다. ‘도’는 이미 다 드러나 있다. 끊어 없앨 것도 없고, 찾고 구할 것도 없다. 그저 흐름에 맡기고 시간 보내는 것만한 것이 없다.
“이 법은 곧 허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허공이 언제 너더러 같다거나 다르다고 말하더냐? 내 잠시 이렇게 말하니, 너는 당장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는구나.”
말에 끄달려서 알음알이를 낼 것 없다. 공부가 훤칠한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 그것이 법을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들은 바 없이 듣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입을 빌어 〈법화경〉을 설했다고 하지만, 본래의 자리에서 보면 망령된 소리다.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도, 주변에 수없이 많은 보살이나 제자들이 함께 하면서 그 기운이 한없이 뻗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해서는 안 됩니까?”
“내 일찍이 너를 방해한 적은 없다. 요컨대 알음알이란 뜻[情]에 속한 것으로서, 뜻이 생기면 지혜는 막힌다.”
알음알이를 내든 내지 않든, 분별할 것이 없다. 본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인데, 번뇌망상이 보리열반과 둘이 아님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따로 구분 짓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이다. 잠시 인연 따라 일어난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을 없애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때 되면 나타나고, 때 되면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서 분별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뜻을 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뜻을 내지 않는다면, 누가 옳다고 말하겠느냐?”
하루 종일 새가 허공을 날아도 흔적이 없듯이, 그렇게 마음을 쓰라고 했다. 뜻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뜻을 일으키면 큰 바다의 성난 파도처럼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고, 내려놓으면 언제 그랬냐 할 정도로 흔적 없이 소화하고 끝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는 동안에는, 분별이니 분별 아니니 따지는 어리석음을 지을 필요가 없다. 수도 없는 생각을 일으키다가도, 한 생각 돌이키면 그저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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