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2,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진리의 세계는 현상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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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1-02 15:36 조회19,211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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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그대 생각에는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그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많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그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매우 많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참으로(實)복덕이 있다면,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까닭에 여래는 그가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는 것이니라."
진리의 실상과 현상의 관계를, 금강경이나 조사들의 언어 모순적 부정논법으로 설하셨습니다. 이번 강의 때 자세히 논하겠으나, 특유의 이 어법 때문에 입문한 많은 수행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봅니다.
불법의 정수, 즉 해탈(解脫)열반인 <괴로움(불안,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이라는 이 경지는 해탈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참 막연한 말입니다.
'나'란 것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이, 가지 가지의 조건이 환경이 되는 相테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더러는, 수 억겁을 윤회하던 어느 방랑자가 문득, 이 모든 근원과 본질과 심연의 아득한 의식과 그 진실에 관하여 또렷한 궁금증을 갖는 이가 있어, 도무지 사량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처님법, 생사해탈의 적멸법에 계합하고, 그 지혜로서 자비로 나타나는 무수한 스승들이 있어, 확연한 오탁악세인 지금에도 이 법을 펴고 있음이 이어지고 있으니, 또한 묘하고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였던 두타제일존자 마하가섭은 음식을 탁발할 때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탁발(托鉢)을 했고, 아난존자는 부자들에게 가서 탁발을 했답니다. 이 사실을 아신 부처님께서는 두 제자를 불러 그 까닭을 물어본 즉, 가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의 공덕을 지을 기회를 주려고 했다는 것이며, 아난은 가난한 사람들은 어렵기 때문에 그들에게 밥을 얻는 것이 그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부자들에게 갔다는 것이었지요.
이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모두가 다 각기 괴로움을 지닌 중생이니 앞으로는 차례대로 탁발하라’고 하셨고 모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위 주제로 TV 토론을 시켜 보면, 과연 부처님의 진실한 뜻대로 이해되는 결론을 낼 수 있을까요?
“만약 복덕이 참으로 있다면 여래가 복덕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복덕이 실로 없는 까닭에 여래는, 그가 얻는 복덕이 많다고 하는 것이니라.”
유루(有漏), 유위(有爲)의 해석이 난무합니다, 한 마디로 유즉시무(有即是無-있음이 곧 없음)이고, 무즉시유(無即是有-없음이 곧 있음)에 해당하고, 무아(無我)가 바로 진아(眞我)란 이치이고 색즉시공(色即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인 그 도리(道理) 이랍니다~. 믿거나 말거나!
복덕과 지혜는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한 쪽만으로는 무용합니다. 복덕과 지혜를 원만 구족하게 이지럼 없이 동시에 닦는 길이 바로 6바라밀이고, 그 원만구족한 수행을 닦는 이가 진짜 보살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가르침부터 그대로 실천해 봅시다.
댓글목록
자현님의 댓글
자현 작성일'위인해설'을 저는 반드시 육바라밀을 통한다로 봅니다.
지선행님의 댓글
지선행 작성일저에겐 이 언어 모순적 부정논법이 정말 어렵고 난해하고 막연합니다. 하지만 나라는 상에 갖혀 살고 있으면서 나 스스로는 자유의지로 살고 있다 착각한 시절을 되돌아 보면 그이치를 이해못함이 당연하다고 하신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알수없고 이해하지 못하는것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할수있는 수행을 실천 하면서 내안의 불성을 찾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