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9,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마음을 깨끗이 함이 善을 행함이다 > 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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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9,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마음을 깨끗이 함이 善을 행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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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1-07 15:29 조회7,910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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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나니, 아상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여, 선법이라 말하는 것은 즉 선법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선법이라고 여래는 설하느니라.” 

제23분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공부 내용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선(善)'에 대한 불교적 이해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간혹 일어 나는 당혹스러운 것은, 더러 자기자신의 주체가 되던 기존의 것들(관념, 정의, 가치관등)을 무너뜨려야 하는 가르침을 만났을 때입니다.

법을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스님들은 대체로 “집착하지 말라” “놓아 버려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고 하면서, 이제까지 배우고 익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하등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그럴싸하고 가치있고 훌륭한 어떤 목표를 설정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세상의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하고 참된 것이 있다며, 그것을 찾으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이켜보니 도무지 탐진치의 번뇌 가득한 마음만 보이고, 어떻게 다스려 지지도 않고, 정체성 혼란에, 가치관 혼란에...뒤죽박죽 엉망인지라 실망만 커져갑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사람들의 이런 심리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가 절대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을 설정해 줍니다. 우리 불교에서조차 중생의 근기와 입맛에 맞추어 극락과 여러 불보살님의 자비가피를 제시해 당장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치유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그 가피의 힘으로 더욱 깊은 신심을 갖게 되고, 선근이 깊어져 어느덧 3법인(法印)이 만고불변의 진리임이 절절히 와 닿을 때, 그 때는 이런 대승과 최상승의 궁극적 가르침을 소화할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불교가 중생의 욕구를 전혀 돌아 보지 않고(복福덕德의 증장과 인연과보), 원론적 가르침에만 입각해 해탈로 이끌기만 하였다면, 저의 개인적 견해로, 단연코 인도에서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지 않았거나 어느 비슷해 보이는 종교로 흡수되어 버렸을 거라 봅니다.

다행히 온갖 相의 틀과 구속을 깨트리게 하는 불법의 특성상, 또 대자대비의 특성상, 대승불교가 나타나고 부처님 말씀의 진실한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이 생겼지요. 그것이 불교의 생명력이고, 미래 어떤 세대에서도 불교를 만나 온전한 지혜와 자비가 발현되고, 그리고 안심, 두려움 없음, 미혹에서 깨어남 같은 말의 궁극에 도달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을 죄인의 틀에다가만 가둬 놓고, 전지 전능한 나의 주인을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구원 얻음만을 가르치는 종교와, 전지전능한 그 무엇을 밖에다 두고 매달리며 쫓는 이들에게 신흥종교나 사교(邪敎)일수록 바른 판단을 할 시간여유를 주지 않고 더욱더 무언가에 의지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근육주사를 놓을 때 다른 곳을 때리면서 주사를 꽂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는 바늘이 들어갈 때의 긴장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여 아픔을 모르게 하는 것으로, 신경계통에 속임수를 쓰는 것이지요. 신경계통을 속이는 가장 강한 것이 마약입니다. 때로는 의사들이 심한 통증에 부득이 처방하기도 하지만, 이 마약에 중독되면 벗어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약보다 더 강렬하게 인간을 마취시키는 것이 바로 상(相-고정적으로 정의된 생각, 관념)인 것입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것은, 본인이 중독됐음을 알기라도 하지, 상相에 빠진 중생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지요. 어떤 관념이든 세뇌(洗腦)가 되면 평생 그 관념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죽하면,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하셨겠습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을 ‘더 위 없이 높고 바르며 평등하고 원만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답하시길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더 위 없다’는 표현을 왜 썼을까요? 그 표현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생명이 근본적으로 평등하기에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할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깨우쳐 준 것이기에 '더 위 없다'라고 한 것이지요.

원래로 고요하고 깨끗한 불심(佛心)을 오염시키는 것 중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것이 바로 4相, 즉 자기중심적 착각인 我相(자의식),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人相(타의식), 중생이라는 한계를 의식하는 衆生相, 그리고 살아있다, 목숨이란 것이 있다고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壽者相 등의 四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23분의 제목처럼 마음을 '깨끗이 한다(淨心)' 뜻은 바로 위 四相을 청소하여 다시는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진정한 선행은 그런 상을 벗어나서 하는 행위는 모두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강의 때, 불경에 나오는 선(善)과 우리 세간사의 선(善)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논(論)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의시간 같이 하신 법우님들은 각자 이해하고 생각되는 내용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자현님의 댓글

자현 작성일

깨끗한 마음을 텅빈 마음,머무름이 없는 마음,고정됨이 없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뗏목의 비유에서 뗏목과 같은 선행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라 봅니다.

Green님의 댓글

Green 작성일

내가 이해한 선은 예를들어 재시, 법시, 무애시를 행할때 상대에게 기대도 바램도없이, 불쌍하다는 상도 냄이없이 그가 필요로하니 "그냥 줄뿐"이 될때 보시바라밀로 보살이 행하는 착한일이되면, 보시를 행하기는하되 여러 상을 낸 선행을 일반적으로 착하다 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상을 지은 선행을 할때 상대의 입장이 아닌 나의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도리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게도 하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인것 같습니다

지선행님의 댓글

지선행 작성일

세간의 선과 불교에서의 선이 의미가 많이 다른듯 합니다. 세간에서의 선은 선과 악을 구분하고 분별해서 선한일. 선한행동. 선한마음등을 도덕적 윤리적으로 교육받고 강요당하며 옳고 그름으로 분별되어 죄책감과 죄의식까지 떠안게 되고 간혹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복을 구하는 불완전하고 이중적인 것에 비해 불교에서의 선은 만물의 법칙인 인연연기에 따라 선한 행위는 좋은 과보를 만들어 자신이 쌓은 악업의 소멸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선과 악의 대립이나 분별이 없이 초월하여 지혜와 자비와 무집착을 실천하고 실상의 법을 깨닫아 중도의 자리..진리의 자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선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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