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16,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교화해도 교화한 바 없다 > 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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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16,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교화해도 교화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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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1-11 20:12 조회19,47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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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그대 생각에는 어떠한가? 그대들은 '여래는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실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여래가 제도한 어떤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여래에게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게 되는 것이니라.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나가 있음(有我)은 곧 ‘나가 있음’이 아닌 것응 말함인데도, 범부(凡夫)들은 ‘나가 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여, 여래는 범부라는 것도 곧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라고 설하느니라.” 



제25분에서는 여래의 중생제도에 관점, 인식입니다. 흔히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濟度-구원or해탈시킴)하셨다”고 표현하지요. 이제 이 정도 금강경을 공부한 법우님들은, 법상으로 그 표현이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사족을 붙어 반복 설명을 드리자면, 불교는, 자신이 스스로 부처임을 직접, 직관의 수행을 통하여 계합하고 해탈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시발점과 과정에서 불보살님이나 선지식이 중생이 미처 스스로 보지 못하고 각성하지 못하는 착각의 전도몽상을 일깨워 주는 교화(敎化), 즉 가르치고 인도하여 스스로 눈 뜨도록 도와 주시지만,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스스로 변화할 마음이 없고 노력하지 않는 중생을, 부처님이 그대로 바로 해탈시킬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차별을 해서가 아니라, 상대세계인 중생계의 원리가, 늘 즐겨 가까이 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스스로 진여법계에 눈을 떠 진리의 감로를 맛보는 것이고, 게으러거나 싫어하고 멀리하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 등져 있기에, 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는 것이 자연적 도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 25분 <교화하나 교화한 바 없는 도리>는  '설해도 설한 바가 없고, 구제해도 구제한 바가 없고 도와도 도운 바가 없는...' <행하여도 행한 바 없는> 그 <법의 실상 도리>에 입각한 것이나, 

현상계의 이치상, 그러나 해탈한 사람이 부처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믿음과 노력으로 해탈에 이른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해탈시켰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지 않으시지요.

경전에는 ‘나(我)’와 그 상반되는 ‘내가 없음(無我)’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초기경전에는 주로 ‘내가 없음(無我)’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데, 그것은 범부중생의 괴로움이 ‘나(我)’ ‘나에 대한 집착(我執)’ ‘나라는 고정 관념(我相)’ 때문에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온갖 집착과 관념이 따지고 보면 ‘나’로부터 비롯되어 확대됩니다. 

 

범부중생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몸(色)과 인식작용(受想行識)의 복합체이데, 모든 괴로움은 그 착각과 오해로부터 비롯됩니다. 제가 늘 강조해 드리는 것처럼, 부처님의 설법은 우리 범부들의 한 면만 보고, 부분만 보는 협시안을 치유하기 위하여 대치법을 사용합니다. 그 아집(我執)을 끊기 위한 처방인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涅槃)을 설명하면서, 해탈열반의 상태를 다음 네 가지 덕목(四德)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바로 상(常), 락(樂), 아(我), 정(淨)입니다. 열반의 경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하고(常),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했기에 적정의 즐거움이 있으며(樂), 법신으로서 참된 나이고(我), 온갖 탐진치 어리석음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났기에 깨끗하다(淨)...라구요.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이와 같이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미혹, 오염(染) 등을 설명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미 괴로움이라는 병증(病症)이 나타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병증을 없앨 처방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병증인 괴로움(苦)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 병증은 의사인 부처님이나 선지식이 수술을 해서 없애듯이 고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병이 자신의 집착과 번뇌(集) 때문에 생긴 것임을 진단해 주고, 

4성제(四聖諦)와 8정도(八正道)로써 병을 고치는 빠른 지름길을 알려 준 것입니다. 의사를 믿고 안믿고, 처방된 약을 쓰고 안쓰고는 전적으로 환자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달린 일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滅)은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상태(寂滅) 정도로만 설명을 하다가, 너무나 궁금해 하기 때문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의 사덕(涅槃四德)을 강조하여 밝혀 놓은 것이지요.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사성제(四聖諦-苦,集,滅,道) 가운데서 범부의 삶을 설명한 고(苦)와 집(集)에 해당되는 이론과 경지에 머무는 정도라면, 당연히 무아(無我)나 무상(無常)만을 이해하고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상의 자리, 여래의 진실을 온전히 보지 못한 여전히 장님이란 얘기입니다. 부처님의 반야부 대승경전 곳곳에서 문자만 보지 말고 뜻을 보아 진실을 깨달아라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 진중하고 사려 깊게, 보다 깊이 수행하여(道) 깨달음에 이르면(滅) 자연히 무아(無我)나 무상(無常) 등이 다만 약방문, 처방전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우리의 본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깊은 병 때문에 갖가지 괴로움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므로, “그대는 어리석은 범부이다”라고 하여 어리석음을 떨쳐 버리고 본래의 지혜로운 모습을 되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청정법신(淸淨法身)으로, 원만보신(圓滿報身-평등)으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생명, 빛, 자비)으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항상, 늘 교화아닌 교화를 하고 계십니다. 

 

"아시겠습니까......!?"

댓글목록

자현님의 댓글

자현 작성일

삼보에 귀의합니다.

지선행님의 댓글

지선행 작성일

우리는 때때로 내몸의 건강함에 너무 자신하고 교만해 함을 봅니다. 내몸이 병들고 병증이 깊어져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바깥 경계에 지나치게 관여하고 시비하고 참견할 일이 아니라 나를 관찰하고 내 몸의 이상의 유무를 알아채는 일이 우선시 되야하며 병을 인정하고 나을려는 의지와 처방을 믿고 따르며 병과의 싸움에서 이기려 노력해야 할줄 압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내몸에 그약을 써야 좋은 약 인줄 알수 있듯이 우리들이 받은 부처님의 처방에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만병통치약 이라 하더라도 백해무익 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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