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23,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한덩어리란 이치는 > 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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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23,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한덩어리란 이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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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1-20 19:03 조회9,02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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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는 티끌로 만든다면, 그대 생각에는 어떠한가? 이 작은 티끌들이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작은 티끌들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바로 이것을 작은 티끌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는 티끌들은 곧 가는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는 티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라는 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곧 이것이 한 덩어리의 모양(一合相)일 것이어니와 여래께서 말씀하신 한 덩어리 모양은 즉 한 덩어리 모양 아니라, 그 이름이 일합상(一合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일합상이라는 것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다만 범부들이 그것을 탐내고 집착하느니라.”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은 총32분 중에서, 그 이해가 가장 난해한 단락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관념을 떠나 본래의 모습, 실상을 보는 눈을 갖춘 이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언어와 관념에 걸려 어려워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핵심 단어 몇 개를 추려 쉬운 예와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삼천대천세계, 가는티끌(먼지로이해해도됨), 일합상(一合相-한덩어리라는 관념,집착)]으로 추려서 짚어 보지요. 

 

삼천대천세계는 중생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한없이 넓고 큰 우주를 가리킵니다.  ※ 1기 불대에서 불교의 우주관 시간에 다루었음. 찾아서 확인하시기 바람.

한량없는 무수한 티끌이 모여 무한한 우주의 덩어리들(태양들, 별들, 땅덩어리들)이 형성되었고, 그 모든 것들은 때가 되어 부서지고 흩어져서 가는티끌이 된다는 것은, 나름의 상상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의 전체나 바탕은 진리자체인 법신불에 해당한다 치고, 작은티끌은 '나'라 치고, '삼천대천세계'와 '나'는 하나다 라는 이치를 가지고... 


법신불인 삼천대천세계에 머물러 살아야 할까요?, 작은티끌인 '나'에 머물러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삼천대천세계가 곧 작은티끌이요 가는티끌이 곧 삼천대천세계라는 일합상(一合相), 즉 법신이 곧 나요 내가 곧 법신이라는 相에 머물러 살아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관념으로 이해하고 고집하고 집착하는 하나 하나를 다 부정하시는 방법으로 선남자 선여인을 일깨우십니다. 


부처님은 수레를 예로 드셨으나, 지금 시대에는 자동차로 비유해 보자면, '자동차'라는 것을 정의할 때, 낱낱 부품자체를 자동차라 하지도 않고, 부품이 빠진 겉모양만을 또한 자동차라 하지도 않지요. 심지어 부품전체를 완벽하게 조립했다 해서 자동차의 목적인 움직여 이동하는 기능이 작동되지도 않습니다. 

에너지를 채우고 운전을 해서 이동하기 위해 달리는 기능을 쓸 때라야 비로소 온전히 자동차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항상 늘 변함없이 그 기능이 작동되는 것만도 아니니, 유한한 수단으로만 쓰입니다. 과연 자동차라고할 고정불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 이 <금강경>의 모든 설명을 다 모아 놓으면 설명하고자 했던 핵심과 계합이 되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하는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팔만대장경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해탈, 깨달음, 부처, 중도, 진여 등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이해하면 해탈하고 깨달아 부처가 되고 진여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해탈'이라는 말이 우리를, 업의 수레바퀴인 윤회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도 않고, '깨달음'이라는 말이 우리를 탐진치와 번뇌를 그만두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부처'라는 말이 우리를 단번에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들게 해주지도 않고, '진여(眞如)'라는 말이 우리의 삶을 맑고 자유롭게 해 주지도 않습니다. '중도(中道)'라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관념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반야지혜를 증득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 존재의 궁극을 찾고, 생노병사의 한계와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수 많은 선근(善根)있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던져 해탈, 깨달음, 부처, 진여, 중도, 자유, 평안을 찾아 수행의 길을 갈까요? 과연 거기에 인생을 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걸까요?  

확실히, 실제로 이 용어가 가리키는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충분하고 분명하겠지만, 용어에 대한 뜻풀이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불교를 신해행증(信解行證-믿고,이해하고,실천하여,그대로되는것), 간단히 말해 수행과 체험의 종교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행의 결과로 깨달아 체득한 경지가 아니라면 모두 관념일 뿐이고, 설혹 직접 체득한 이가 그 경지를 다른 이에게 잘 설명해서, 그 설명을 들은 이가 스스로 향상되거나 또는 이후에라도 체득하지 못한다면, 그 말이나 용어나 개념들은 그저 짙은 안개 속에서 멀리 있는 사물을 어렴풋이 짐작만 하게 할 것입니다.

원효와 쌍벽을 이루었던 신라 의상조사(義湘祖師)는 <법성게(法性偈)>에서 연기실상(緣起實相)의 이치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것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 있어(一中一切多中一), 

하나는 모든 것과 만나고 모든 것은 곧 하나와 만난다(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그 가운데 우주를 머금었고(一微塵中含十方), 

모든 티끌들도 다시 또한 그러하다(一切塵中亦如是).’ 

그러나 연기의 원리를 살펴 체득한 경지인 깨달음이나 진여등은 언설로 깨달아 지거나 알음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아니므로, <법성게(法性偈)> 첫머리에는 먼저 이런 설명으로 시작하지요.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法性圓融無二相), 

모든 법 움쩍 않아 본래로 고요하네(諸法不動本來寂).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겼으니(無名無相絶一切), 

깨친 지혜로만(반야) 알 바요 달리는 알 수가 없는 경계라네(證智所知非餘境).’

언어는 아무리 명료한 것이라도, 그대로 자체인 실체가 아닙니다. 정진하고 닦아 확인하고 체득하지도 않으면서,  깨달음이나 법신(法身) 등을 마치 객관적인 어떤 존재, 또는 상태인 것처럼 관념의 相을 짓는다면, 그저 착각과 집착을 벗지 못하는 중생병을 앓고 있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댓글목록

자현님의 댓글

자현 작성일

제가 이해한 바는 법의 이치는 실제 현상계에 존재하며,단지 그 상에 머물지 말며, 그 모두가 텅비어 있음을 봅니다.그리고 육바라밀을 통해서 보살도를 행해야만 마하반야바라밀을 완성한다 봅니다.

지선행님의 댓글

지선행 작성일

믿고 수행하고 실천하고 확인하고 증명해서 스스로 깨쳐서 알아지는것.. 문자로 보고 듣고 배워서 알게 되는게 아닌 내몸이 행한만큼 알아지는것.. 도리를 깨치고 닦아서 부처가 되는게 아니라 본래 부처인 나를 바로 알아 보는것.. 구하고 얻으려는것이 아니라 내게 이미 있음을 알아채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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