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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대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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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2-14 19:12 조회17,4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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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대행원'은 화엄경의 맨 마지막 장에 나오는 '보현행원품'이라는 경전입니다.

여기에 보현보살이 열 가지 발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실천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가겠다는 것이 보현십대행원이며 화엄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보현십대행원입니다. 십대행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 
둘째,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 
셋째, 불보살을 널리 공양하는 것, 
넷째, 자기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는 것. 
다섯째,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
여섯째, 설법하여 주기를 간청하는 것.
일곱 번째,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 곁에 오래 와 있기를 청하는 것, 
여덟 번째, 항상 부처님들 따라 배우는 것,
아홉 번째,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 중생을 수순한다는 것은 중생을 잘 배려하고 보호하고 감싸며 중생을 위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열 번째, 지은 바 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의 여섯 가지입니다.  
육바라밀과 보현십대행원은 보살행의 구체적 수행 덕목입니다.
보현십대행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 
이것을 보살 수행의 첫째로 삼는 데, 왜 부처님께 예경을 드리느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삼계의 대도사이고 사생의 자부입니다.  예불문에 첫째 구절을 보면  '삼계대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이라고 나오지요. 삼계대도사에서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는 공간적 세계이고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적 세계를 의미합니다. 욕계는 욕심으로 이루어졌고, 색계는 욕심보다는 한 단계 높은 세계이고, 무색계는 색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세계입니다. 수행력에 따라 구분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온 우주를 통털어 이야기합니다. 도사는 선생님이라는 뜻도 됩니다.

사생은 온 우주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을 말하는데 '태란습화(胎卵濕化)'라 해서 태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알로 태어나는 란, 습기만 있으면 생명이 태어나는 것들은 습, 화라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하나는 불에서 태어난 것과 이것이 변화해서 태어난 것으로 태나 알이나 습기에서 태어나든 변화를 거쳐 완성된 생명으로 되는 것을 화생이라 합니다. 
이 네 가지 방법으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납니다. 사생자부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 모든 중생들의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보다 더 중요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나를 태어나게 해주셨고 보호하고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조건 없이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도록 발원하고 기도하시는 분이 아버지이고 그런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그런 부처님을 사생자부, 모든 중생들을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스승이며 자비스런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감사와 존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기에 부처님께 예경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보살의 첫째 수행덕목입니다. 그런데 이 수행 덕목에 비추어볼 때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존경과 효도를 하느냐? 그리고 부모님이 불편하지 않게끔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 하느냐? 
우리는 개인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살아갑니다. 나에게 이익이 있으면 친하게 지내고 이익이 없으면 부모라 해도 인연을 끊고 내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모님을 제주도에 갖다 버린다는 지, 이민 갈 때 놔두고 간다든지, 아들이 모셔라, 딸이 모셔라 하고 동생은 형이 모셔라, 형은 처지가 안되니 니가 모셔라 합니다. 탁구공 신세입니다. 부모님은 낳아서 길러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다 갖다 바치는데 자기끼리 편히 살겠다고 하니 무료 보호소에 가서 아들이 대기업 간부인데도 불구하고 숨기고 곧 죽어가면서까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밝히면 아들 명예가 훼손된다는 생각에 그럽니다. 
나 같으면 이 주장자를 가지고 뒤지게 두드려 팰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내가 고통스럽고 외롭고 쓸쓸하게 내팽개쳐 죽을지언정 아들 명예를 보호합니다. 그런 부모님이고 부처님 보살님 입니다. 그런 분께 감사하고 찬탄하고 예경과 존경하는 이것이 첫째 인간의 도리이자 첫번째 수행자의 도리입니다.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행복하며 그런 부처님이 계시기에 마음놓고 살수 있고 앞길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해외여행을 패키지로 다니다 혼자 떨어져 말도 안통하고 길도 모를 때의 난감함이 있습니다. 그때 원어가 통하는 한국사람을 만난다든지 길을 잘 안내를 받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때에 한국 사람 만나서 자기가 원하는 곳을 안내 받을 때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부처님은 이처럼 중생들의 삶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 목표, 의미, 길을 몰라 헤매일 때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가라, 이렇게 살라고 깨우쳐주십니다. 깜깜한 밤에 등불 없이 길을 잃어버렸을 때 저쪽 숲 속에서 횃불을 들고 나타나 길을 안내해주는 분과 같은 분이 부처님입니다. 이런 분께 고맙고 찬탄하고 존경,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분이 부처, 보살입니다. 부모님은 또한 이런 분입니다. 그런 분께 찬탄해야합니다. 부모님 잘 못 만나 이렇게 밖에 못산다 하면 박복한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불보살에 대한 고마움, 이런 것을 간절히 느낄 수 있어야만이 되는 것입니다. 느끼고 깨우치는 사람은 부처님께 찬탄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불보살을 널리 공양하는 것.

오늘 아침도 떡 공양을 하려하는데 떡시루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올려 있는 떡시루가 조계사 떡시루 전체를 다 올려놓아서 더 올리려 해도 못 올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떡 시루를 무슨 마음으로 올렸습니까? 부처님을 찬탄, 예경하는 마음으로 떡 시루 공양을 올렸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뜻이 있습니까? 아마 부처님을 예경하는 마음으로 올리는 것은 반도 안되고 그것과 상관 없이 학업성취, 백일기도, 사업성취를 빌며 올린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뭔가 부처님을 항해 소원을 발원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좋은데, 꼭 내 발원만을 성취하려고 요구만 할 것인가. 아니면 부처님을 만나고 가르쳐주시고 고마운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떡 시루를 올리는 공양은 없느냐. 이런 마음으로 올리는 공양이 있다면 기도성취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없고 내 마음에 빈 구석이 있으니 이것을 채워달라고 올리면 그 찬탄하고 공양하고 예경하는 마음이 문이  열릴 때까지는 여러분 스스로가 기도성취를 보류를 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행복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육체적 심리적 질병이나 병이 있다면 건강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전에도 말했듯 오늘 이렇게 부처님 곁에 와서 기도하고 예경하고 또 수행을 하고 법회할 수 있는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행복은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이상하게 생겼습니까? 행복은 우리 곁에 널려져 있는데 그것을 잘 발견하고 느낄 수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널려있는 행복을 다 외면하고 뭘 찾아서 행복을 느끼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집에 가다가 보면 우편함에 우편물이 많이 와 있는데 대부분 홍보물입니다. 거기서 옛날 친구가 아주 정성스럽게 펜으로 쓴 편지가 왔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옛날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보고싶다, 한번 만나자 하면 그 편지를 보고 행복할 줄 알아야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죠. 제가 시 한편 읊겠습니다.


우리 곁에 숨어있는 행복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슬픔만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유독 슬픔과 친하고 슬픔만을 더 잘 느끼는 것일까.
기쁨을 채 모르면서 슬픔을 다 알아버린 듯한 못난 인간의 습성
우리는 분명 슬픔만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는 행복을 충분히 즐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아침엔 어김없이 창가에 스며드는 햇살에서 
온 들판에 메우고 있는 이름 모를 한송이 들꽃에서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의 미소에서
이른 새벽 비에 씻겨내려간 도시의 모습에서 
추운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의 언 손을 부여잡은 따스함에서 
충실하게 하루를 보낸후 몸을 뉘우는 잠자리에서
지친 어깨로 걸어오다가 집 앞 우체통에서 발견한 친구의 편지 한 통에서 
우리는 어느날 행복을 발견합니다. 
결국 행복은 소리내어 뽐내지 않을 뿐 늘 우리 곁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속에서 느낌이 없으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감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니까 행복을 가져다 줘도 못 느껴요.
어쨌든, 이처럼 부처님과 불보살님과 부모님에 대한 공양과 찬탄, 예경, 효도를 수행자로서, 불자로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발전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개인 이기적인 가치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고 이기심이 충족될 때만 만족하는 삶입니다. 그것도 삼일 정도 지나면 불만족으로 욕심부리며 끝없이 불만족하다가 불만족한 느낌으로 지구를 떠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부터 기도하든 수행하든 일반적 가정생활을 하던지 간에 불보살님에 대한 부모님, 형제, 이웃, 스승에 대한 고마운 분들을 찾아보라는 것이죠. 그것을 찾아서 느끼고 고맙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그리고 이런 고마운 은혜와 도움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간절히 느껴보란 말입니다.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느낀 다음에 자기는 이런 느낌을 못 가지고 살았을 때, 죄를 지었을 때 업장을 참회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스스로 갖춘 모든 공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부처님과 불보살님과 대상 세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나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섯째,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하는데 왜 그럽니까? 요즘은 논 안 사고 사돈이 아파트만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해야합니다. 이유 없이 배 아픈 사람은 없겠죠. 이런 사람은 심보가 나쁜 사람입니다. 요즘 경쟁시대이기에 경쟁에서  상대방을 제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가 생활 속에 만연이 되어서 같은 업종, 같은 연배라든지 계속 경쟁을 해야합니다. 그나마 그냥 제끼고 가면 좋은 데 제끼고 다시는 못 올라오게 밟아버리고 갑니다. 이렇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합니다. 상대방이 잘 살아야만 나도 잘 삽니다. 국가, 사회, 경제가 안정되고 정치가 안정되고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 합당한 가치의식을 갖추고 살 때만이 나의 삶도 평화롭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 사회가 엉망이고 사람들의 가치 의식은 주변 사람들을 거꾸로 들려고만 하는데 내가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까?   도둑놈이 들끓는 세상에서 내가 안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같이 기뻐합시다. 그렇게 상대방을 배려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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